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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샤트 키 타보

샬롬, 한 주만 좀 더 지나면 우리는 아담의 생일인 로쉬 하샤나, 즉 문자 그대로 ‘올해의 첫머리’를 맞이할 준비를 하며 세상에 새로운 빛을 비추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에 하쉠께선 모든 피조물들이 다시 시작되도록 모든 하늘의 문을 활짝 열어 두게 됩니다.

로쉬 하샤나는 쇼파르(양각 나팔)의 큰 소리를 동반하는, 하쉠께서 창조자이며 우주의 왕이라는 우리의 깊은 인지와 선언의 두려운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 위대한 때를 위해 어떻게 영적으로 준비할 수 있을까요?

드바림(신명기) 26장에서 시작하는 이번 주 토라 부분인 ‘키 타보’에서, 모셰는 이스라엘 아들들이 이스라엘 땅에 들어갈 수 있게 계속 준비시킵니다.

이 부분의 이름은 시작 문구인 ‘베하야 키 타보...’에서 따왔습니다. ‘너가 하쉠,네 엘로킴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시는 그 땅에 들어와서...’


그리고 이 말은 또한 엘룰 월과 함께 다가올 새해를 암시하는데, 여러분이 목표를 달성하고 새로운 현실에 들어서는 갱신과 회개의 과정이 정점에 이르러 목적지에 ‘도착할 때’, 즉 도달하면, 우리의 몫은 이스라엘 땅의 첫 열매인 ‘비쿠림’을 거룩한 성전으로 가져오라는 계명으로 시작됩니다.


유대인 순례자는 수확물의 첫 열매들을 제물로 바치면서 민족의 삶과 자신의 삶에서 하쉠의 모든 기적에 대한 감사의 감동적인 선언을 낭송하고, 코헨(제사장)과 함께 성전의 큰 제단 옆에 서서 하쉠 앞에 바구니를 놓고 감사의 마음을 담아 엎드려 절합니다.

이 첫 열매를 바치는 것은 초월적인 기쁨의 경험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우리를 끊임없이 다시 시작케 하시는 창조주와 모든 존재들이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현실 자각’의 역할을 해줍니다.


이것은 겸손케 하는 궁극적 훈련으로, 내 자만함으로부터 내려와 내 삶에서 하쉠을 인정할 때 피어나는 진정한 겸손을 나의 조상인 첫 사람 아담의 창조의 장소인 이 거룩한 제단으로, 겉으로는 자기 노력의 결실처럼 보이는 것을 품에 안고 가져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분명 ‘나의 노력’이 아니라 ‘하늘의 선물’인 것을 인정합니다.

나는 하쉠께서 나를 위해 하신 일을 분명하게 보고 인정하며, 세대들의 변화에서 나의 위치를 인정합니다.


우리가 느끼는 그 기쁨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이해하는데서 오는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하쉠의 세상에서 우리의 위치가 어떠한 지를, 그리고 이것은 또한 우리를 완전히 새롭게 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합니다.

유대인들은 매주의 토라 부분과 함께 하쉠의 신성한 계절 변화의 합류에 힘을 싣는 신성한 동시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 도구들은 항상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갖추고 있는데, 유대력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우리 자신의 운명과 만나는 것을 맞이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로쉬 하샤나를 위한 영적 수준의 준비 일환으로 ‘첫 열매’를 제물로 바치는 것에 대해 읽는 건 우연이 아닙니다.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일까요?

로쉬 하샤나와 첫 열매인 비쿠림은 같은 뿌리에서 나오며, 둘 다 같은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아담의 인식과 부활의 비밀로, 둘 다 ‘완전한 원’을 그리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설명했듯, 첫 열매는 로쉬 하샤나에 아담이 창조 된 바로 그 장소인 제단이 있는 부활의 본거지인 성전으로 가져와 하쉠 앞에 놓입니다.


이제 마음을 열어보세요,

우리는 아담의 생일인 로쉬 하샤나에 어떻게 하쉠을 섬겨야 할까요?

새해인 로쉬 하샤나의 쇼파르를 들을 준비를 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배워볼 수 있는 가장 깊은 비밀들 중 하나입니다.


베레쉬트(창세기) 2:7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 바와 같이, 그 날은 그의 코에 생명의 호흡이 불어넣어진 날입니다.

‘신성한 영’인 우리의 생명력은 다름 아닌 하쉠의 숨결입니다.

그는 사람처럼 ‘숨을 쉬는 분’이 아니며, 그 의미는 우리의 생명이란 것이 그 분으로부터 직접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우리 모두는 그 분의 일부입니다.

유대 현인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숨을 내뱉는 사람은 그의 내면에서도 숨을 내뱉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너무 깊은 것으로, 그것이 몸이 아니라 진짜 우리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아담입니다.

바로 이것이 로쉬 하샤나가 하쉠께서 세상과 각 나라와 개개별을 판단하시는 ‘심판의 시간’인 이유입니다.


우주의 왕께서는 아담의 모든 후손을 심판하시고 바로 이 날에 각 사람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십니다.

그 분께선 판결을 위해 각각을 검사합니다.

‘내가 너에게 준 그 숨을 너는 어떻게 사용하느냐?’

‘모든 아담들은 오늘 받은 그 숨결로 그들의 삶에서 무엇을 하는가?’


그 분의 공의는 항상 동정심과 함께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로쉬 하샤나에 어떻게 하쉠을 섬겨야 할까요?

로쉬 하샤나에 대한 신성한 섬김은 왜 더욱 더 정교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나팔 소리’를 듣기 위함일까요?


여러분은 ‘말’에 한계가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대부분의 모든 오해라는 것은 ‘말’로 인해 발생하는 것을 압니다.

커플 간에, 부모와 자식 간에, 친구 간에, “내가 말했고, 그녀가 말했고, 그가 말했고, 그런데 넌 이렇게 말하지 않았고, 그건 내가 말하려던 의미가 아니었고...” 등등, ‘언어’라는 것을 초월한 의사 소통 수단이 더 있다면 과연 무엇이 가능할까를 상상해 보세요.

오해의 가능성을 넘어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로쉬 하샤나에는 하쉠께서 우리를 검사합니다.

내 실수와 헛된 노력, 방황, 집중력 부족, 나의 부족함들, 내 사소한 이기심들에서 어떻게 내 자신을 정당화 할 수 있을까요?

실로 나는 그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이 없습니다.

심판의 날에 내가 얼마나 방심했는지를 설명할 변명거리가 떠오를 수 있다고 자신한다면, 그건 꽤 ‘한심한’ 것입니다.

해서 이 날에 온갖 핑계와 변명으로 하쉠께 자신을 정당화하려 하지 말고, 평생의 그 어느 때보다 더 깊이 마음의 문을 열어 보세요...우리가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그 분께서 우리에게 불어넣으신 것과 같은 숨을 들이쉬고, 말들로 더럽혀지지 않은 그 숨결을 꾸밈 없이 그 분께 돌려드립니다.

우리는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나오는 이 호흡, 즉 그 분께서 아담에게 주신 것과 같은 순수한 호흡을 그 분께 돌려 드립니다.

‘내가 깊은 곳에서 하쉠 당신을 부르니...’ (트힐림(시편) 130:1)


우리는 나팔 소리와 함께 순수한 생명의 숨결로 원을 닫고, 그 순수한 소리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가장 깊은 관점을 부여해 하쉠께 돌아가는 길을 찾게 하며, 첫 열매를 성전에 가져오는 행위는 창조주께서 온 세상을 끊임없이 새롭게 하신다는 계시를 제공해 줍니다.


로쉬 하샤나가 말 그대로 ‘시작’, ‘한 해의 첫머리’를 의미하는 것처럼 첫 열매인 비쿠림도 새로움의 비밀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시작’이라는 의미의 레쉬트라고도 불립니다.

문제는 키 타보의 토라 부분이 극단적이며, 심지어는 정반대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나 한편으론 첫 열매를 성전으로 가져오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의 표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번 파라샤는 또한 28:15에 소개된 ‘계명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이스라엘에게 닥칠’ 이른바 저주를 특징으로도 합니다.

‘만약 너가 하쉠, 네 엘로킴의 소리를 듣지 않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들과 그의 모든 법들을 지켜 행하지 않으면 이 모든 저주들이 네게 와서 네게 임할 것이다.’


토라 낭독 시작 부분의 ‘첫 열매’를 가져오는 측량할 수 없는 기쁨과, 측량할 수 없는 고통스럽고 두려운 저주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요?


마음을 진심으로 열어 보셔야 할 때입니다.

이 구절에는 육체적 고통보다 더욱 심한 개인적 슬픔의 끔찍한 느낌이 담겨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실존적 고뇌이며, 우리가 하쉠을 거부할 때 자연스레 받게 되는 가차없는 불안입니다.

이 구절에서 나오는 우리 앞에 펼쳐지는 어두운 묘사나 악몽 같은 환영은, 우리 자신이 창조한 ‘신이 없는 세상’의 혼란스러운 가상의 텅 빈 곳에서 살기를 고의로 선택하고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단절시켜낸 결과입니다.


생명의 근원과 늘 새롭게 연결된다는 것은 기쁨의 근원에 연결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토라는 이 가장 놀라운 구절에서 ‘이러한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무섭고 반역적인 죄를 범한 것에 대한 형벌이 아님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토라는 28:47에서 이러한 저주가 당신에게 닥친다면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때문임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풍부한데도 하쉠, 네 엘로킴을 너가 기쁨과 좋은 마음으로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훈계의 구절은 우리가 모든 것이 하쉠으로부터 왔으며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위한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읽고 이해해 보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하쉠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면, 이러한 일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은 그 분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자초한 우리 자신의 행동의 결과일 뿐인데, 거기엔 즐거움의 감사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들을 묘사하는 거친 말들은 우리의 삶에 하쉠께서 숨겨져 있는 모습을 그리는 것과 같이 묘사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선택으로, 그 분이 아닌 우리가 그 원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우리 자신의 결점에 대해 그 분을 비난하는 겁니까?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이 없다고 여기기에 그 분을 비난하는 것인가요?


우리가 방금 이야기했던 아름다움, 달콤함, 감사와 인정으로부터 나오는 새로운 것에 대한 그 모든 것들?...이 부분에서의 저주는 그 반대입니다.

취약함, 무기력, 좌절감, 무익함, 조종 당함, 팔려감, 학대, 악의적인 세력의 지배 아래, 고립된 미쳐버린 세상에서의 포로가 되는 궁극적 악몽 등, 이 모든 설명들은 하쉠과의 연결이 끊어진 것에 대한 정의로, 그것은 하쉠이 ‘진짜’인지 의심을 하도록 하여 관계를 모호하게 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첫 번째 열매의 경험과 로쉬 하샤나의 쇼파르와 반대로, 그것은 우리 자신을 늙게 하고 얽매임을 당연하게 여기도록 인정하게 합니다.

이번 부분인 ‘키 타보’의 부분과 지난주의 ‘키 테쩨’ 부분의 결말의 연결 사이는 실제로 연속성을 가지는데, 이 부분은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야 한다는 것을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는 명령으로 끝납니다. 아말렉은 이스라엘의 쓰디 쓴 원수지만 아말렉의 전쟁은 하쉠 자신에게 대항하는 전쟁이자 그의 백성에 대항하는 전쟁으로 나타나기에, 아말렉을 멸할 영원한 전쟁을 맹세한 이는 사실 이스라엘의 하쉠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슈모트(출애굽기/탈출기) 17:16의 ‘신의 보좌 위에 손이 있고, 하쉠의 전쟁이 대대로 아말렉에 있을 것이다’라는 부분을 읽습니다.


아말렉의 영성은 ‘의심’이며, 이는 거룩한 성전의 의식과 그 거룩한 성전으로 비쿠림을 가져오는 것으로 예시된 바와 같이 ‘하쉠을 위해 산다는 것’과 정반대로 하쉠과의 단절을 부추깁니다.

아말렉의 ‘머리 공간’은 우리에게 속삭이길: ‘이건 아마도 단지 자연적, 우연적 일치일 것이다. 그것들은 있는 그대로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눈 앞의 하쉠을 보기 어려울 때마다 그곳엔 아말렉이 서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하쉠의 임재를 잊게 하고 모든 것을 탁하고 낡게 만드는 것으로 시작해 신은 없다라고 우리를 설득하고 속임수로 끝맺음을 합니다.

우리가 아말렉의 의심에 굴복한다면, 네샤마, 즉 우리의 ‘영’은 모든 것에서 찢겨지고 세상은 죽게 됩니다.

우리의 첫 열매는 그저 한 움큼의 열매일 뿐이고, 세상엔 신의 지시란 게 없이 우리 앞에 열려 있습니다. 우리 앞에 열린 ‘세상의 시각’은 모셰가 이 파라샤에서 공유하는 ‘우리의 세상, 우리의 땅, 우리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아말렉을 쫓아내지 않은, 하쉠에게서 멀어지는 것에 대한 훈계’의 직접적인 결과입니다.


아말렉의 사기는 모든 창조물을 ‘영생의 근원’으로부터 분리하게 합니다.

아말렉의 어두운 곳은 모든 것을 늙고 죽게 합니다.

하쉠과의 연결을 잊는다는 것은 아말렉의 승리를 얘기합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린다는 건, 사실 우리가 우리의 세상에서 하쉠을 잊은 것에 대한 것을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첫 열매로 표현된 갱신의 외침, 그리고 새 출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줄 순수하고 거짓없는 쇼파르 소리, 이것들이 아말렉의 위험에 대한 직접적 반응입니다.

‘아니 레도디 베도디 리(나는 내 사랑하는 이의 것이고 내 사랑하는 이는 내 것이다)’라는 쉬르 하쉬림(아가서) 6:3은 엘룰 월 동안 우리가 배운 모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번 주 부분에 포함됩니다.


하쉠과 우리와의 관계의 친밀함, 그것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첫 열매를 가져오는 자가 하쉠앞에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고, 나는 살아있으며 내 백성은 존재합니다. 당신께서 우리를 이 땅으로 데려오셨으니 당신의 친절하심에 모두가 감사드립니다’라고 하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로쉬 하샤나를 경험한다는 것의 동일한 목표입니다.

삶의 놀라움과 새로움으로 인해 영원히 갱신되며 경이로워 하고, 항상 새롭게 되고자 노력하고 삶을 두려움과 감사로 바라보는 것,


그렇게 올해가 끝나갈 무렵 우리가 함께 끊임없이 갱신되며 삶의 경이로움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다가오는 해에 하쉠의 새로운 빛을 받아들이며 우리 삶에서 창조주의 좋으심을 모든 것의 근원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선포하고, 온 세상에 큰 소리로 노래할 수 있기를...


글쓴이: 라브 하임 리치만 Rabbi Chaim Richman

번역: 아담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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