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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샤트 코락흐 5783 '하늘에서 온 토라'

샬롬, 이번 주 이스라엘 땅에서의 토라 읽기는 바미드바르(민수기) 16장에서부터 시작되는 파라샤트 코락흐입니다.


이번 파라샤는 악명 높은 적대자인 코락흐(고라)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죠.

그는 일반적인 ‘무정부주의자’나 ‘훌리건’ 등은 아니었는데, 코락흐는 모셰와 아하론의 가족 계보에 속한 중요한 레비(레위)인이면서 실로 가장 뛰어난 자였습니다. 그는 학식이 있었고 존경을 받는 자였습니다.


이야기가 표면상으로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코락흐는 모셰와 아하론의 권위에 도전하면서 그들이 사리사욕으로 행동하고 백성을 지배하려 한다고 주장하며 그들의 지도력에 대항해서 250명의 무리를 이끌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며, 그리고 하쉠의 전례 없는 보응으로 코락흐와 그의 모든 회중, 그리고 그들의 모든 것이 땅에 삼켜졌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토라 학자들은 파라샤트 쉘락흐와 코락흐가 연대순으로 나타나기에 코락흐의 사건이 광야를 유랑한지 2년 째 되는 해에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반란이 하쉠의 명령에 대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 ‘정탐꾼들의 사건 직후’에 일어났다는 것은 우리에게 놀라움을 안겨줍니다.

그러나 코락흐의 반란은 자발적인 폭발이 아니라 계산되고 계획된 음모였습니다.

코락흐와 그의 추종자들은 반역을 계획해왔고, 정탐꾼들의 사건을 구실로 삼아서 모셰와 아하론의 지도력에 도전한 것입니다.


마음을 열어보세요.

우리는 ‘금송아지의 죄’나 ‘정탐꾼들의 죄’들이 가장 최악의 죄일 것이라 확신하겠지만, 이 세대가 광야에서 겪었던 그 모든 어려운 일들과 모든 배교들, 죄와 실패의 사건들 중에서 코락흐의 사건이 가장 혹독했습니다. 왜일까요?


우리는 오히려 코락흐의 논쟁은 심각하더라도 ‘가족 간의 싸움’인 내부 분쟁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가장 가혹했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로는 이 반역이 정확히 모셰의 가계 안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유대 현인들은 금송아지의 죄는 에레브 라브(거짓으로 섞여 들어온 거짓 개종자들)에 의해 선동되었다고 가르치는데, 그들(에레브 라브)이 사람들의 참여를 독려했던 것이었으며 비슷한 맥락으로 정탐꾼들의 부정적인 보고로 인해 뒤따른 히스테리적 불길을 부채질해 자신들의 두려움이 이스라엘 전체에 퍼지게 한 것도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 중 낮은 계층이었던 그들인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책임을 전가할 주소지를 가지는 것이 그저 ‘편리했음’을 말해줍니다.

이 두 가지 심각한 죄를 이해하는 데 있어 우리는 ‘변명’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파라샤에서 반역을 이끌던 이는 다름아닌 모셰와 아하론의 사촌인 코락흐였습니다.

이 자는 레비 지파의 자손이었죠.


레비 지파 전체는 한 사람도 금송아지의 죄에 연루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그들은 거기에 참여하지 않았었습니다.

코락흐 또한 그 끔찍한 일에서 자신을 분리시켰으며 그 일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습니다.

코락흐는 심지어 하쉠께서 정하신 증거궤를 옮기는 임무를 맡은 특정 레비인들 중 한 사람이었죠.

이 가족 그룹은 사제 직분으로서 성실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반란이 가족 내부에서 일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사건은 ‘가혹함’이라는 자체의 범주로 떼어놓고 봐야 합니다.

그러나 일단 이것은 제가 보고자 하는 주요 방향은 아닙니다.


이것을 이렇게 비판적으로 만든 또 다른 요인이 있는데, 처음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어떤 의미로 금송아지의 죄와 정탐꾼의 죄보다 코락흐의 반역을 훨씬 더 심각하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파라샤를 펼쳐보면, 모셰는 코락흐와 그의 추종자들을 달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는 코락흐와 얘기를 나누고, 다탄과 아비람을 만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죠. 코락흐 자신도 그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우리는 모셰의 만남의 초대에 대한 다탄과 아비람의 응답을 읽을 수 있죠:

“우리는 올라가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부터 올려 광야에서 우리를 죽게 하려고 한 것이 적은 일입니까? 그런데 당신은 우리 위에 군림하려고까지 하고 있습니다.”


모셰는 이스라엘 민족 모두를 위해 행한 모든 일들과, 그에게 불만을 품었던 그룹들과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 후, 성막에서 하쉠의 임재 앞에 섬기도록 선택된 레비인으로서의 그들의 위대한 지위를 상기시켜 줍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 이후 그들이 모셰에게 말하는 방법은 이럴 수 밖에 없었던 건가요?

미쯔라임(이집트)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나요? 모셰가 그들을 죽게 했습니까? 그가 그들을 지배하고 있나요?


그 상황의 심각성은 모셰의 반응의 심각성을 통해서 우리에게 더 분명해집니다:

우리는 16:15에서 ‘모셰가 몹시 괴로워하여 하쉠께 말했다. “그들의 제물을 돌아보지 마십시오. 저는 그들로부터 당나귀 한 마리도 취하지 않았고 저는 그들 중 한 명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읽습니다.


그리고 그러고나서 향로를 들고 코락흐의 회중 250명을 시험할 때 향로를 든 아하론의 맞은 편에서 모셰는 자기 자신을 매우 가혹하게 표현합니다:

‘모셰가 말했다. “내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하쉠께서 이 모든 일을 행하도록 나를 보내심을 이것으로 여러분들이 알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닥치는 것처럼 찾아와져 이들이 모든 사람의 죽음처럼 죽는다면 하쉠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하쉠께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셔서 땅이 그 입을 크게 벌려 그들과 그들의 모든 것을 삼켜서 그들이 산 채로 슈올(스올)로 빠진다면 여러분은 이 사람들이 하쉠을 화나게 한 줄 알 것입니다.”’

거기서 참고 사항은 ‘하쉠을 화나게 한 줄’입니다. ‘자기’를 화나게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모셰의 이러한 반응과 행동은 우리가 그에 대해 알고 있다는 모든 것, 그리고 우리가 봐온 것들과 완전히 대조됩니다. 너무나 가혹한 반응이기에 지금까지 항상 그의 관용과 겸손, 이타심 등으로 나타난 그의 본성과는 정반대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모셰의 특징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우리는 실로 금송아지의 죄의 여파로 모셰가 온 민족을 위해 기도했으며,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슈모트(출애굽기/탈출기) 32장에서 하쉠께 외쳤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렇더라도 지금 당신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면, 그리고 혹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면 부디 당신께서 기록하신 당신 책으로부터 저를 지워내 주십시오.”

그리고 정탐꾼들의 죄에서도 모셰는 백성을 위해 기도했으며, 하쉠께서는 그 세대가 그 땅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는 선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가 말한 대로 용서했다.’라고 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번 파라샤에서 모셰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가 항상 그래왔듯 그들을 호의적으로 판단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가 항상 해왔던 것과는 반대로, 그리고 우리의 기대와도 반대로 행동합니다.

그는 그들을 위해 특별하고도 특이한 처벌을 요구했습니다. 그는 정상적인 범주를 완전히 벗어난 어떤 일이 일어나야만 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땅의 입이 열려 그들을 삼켜야 한다고 하쉠께 요청합니다.

우리는 모셰의 이러한 극단적인 반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더욱이 그의 방식으로부터의 또 다른 특이한 변화로, 모셰는 “모든 사람에게 닥치는 것처럼 찾아와져 이들이 모든 사람의 죽음처럼 죽는다면 하쉠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닐 것입니다.”라고 선언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다 무엇이란 말인가요?

여기서 모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는 왜 이렇게 극단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할까요?


표면적으로는 이 이야기를 피상적으로 볼 때 모셰는 단순히 모든 것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였고 개인적으로 기분이 상한 것으로 보인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그를 비난한 게 매우 모욕적이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왜 하쉠의 회중 위에 자신들을 높이고 있습니까?’

이것은 심각한 비난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이 점이 모셰를 궁지로 몰아넣고 가혹하게 대응하도록 강요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죠. 그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지도력과 권위를 맡았으며 신성하게 명령 된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매우 피상적인 이해입니다.


그런 반응은 평범한 사람으로부터라면 예상할 수 있는 것이지만, 모셰에게는 단순히 그것이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것은 그저 그가 아닙니다.

백성을 대신해 하쉠께 자기의 이름을 지우라고 뜻을 밝힌 사람이 겸손한 하쉠의 종이란 귀감이 될 수 없다는 건 그처럼 이타적인 자에겐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건 인격적인 모욕입니다.


보세요, 미르얌이 그에 대해서 말했을 때 모셰는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금도 그 비판을 개인적으로 받지 않았습니다.

바미드바르 12장의 파라샤트 베하알로텍하에서 그것에 대해 모든 말씀을 하고 꾸짖은 분이자 그것을 문제로 만든 이가 하쉠이었다는 걸 기억하세요.

그 전체 에피소드에서 모셰는 미르얌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는 것 외에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모셰는 자만함이 없는 자였으며, 무언가를 개인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초월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에선 ‘모든 이들이 모든 사람의 죽음처럼 죽는다면 하쉠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닐 것입니다’라고 예외적인 형벌을 하쉠께 요구할 정도로 자신의 본성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걸까요?


여기서 가장 깊이 마음을 열어보세요.

처음에 말했듯 코락흐의 반역에는 금송아지의 죄와 정탐꾼의 죄에 포함되지 않은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코락흐의 반역을 광야에서의 다른 어떤 죄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요인입니다: 그것은 코락흐가 자신이 대제사장으로써 아하론을 대체하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미드라쉬)만은 아닙니다. 여기엔 다른 것이 있는데, 바로 온 민족을 선동하기 위해 코락흐가 들고 나온 주장입니다: 그는 모셰가 아하론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한 것이 모셰 자신의 결정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신성한 명령으로서의 예언이 아닌 자기 형에게 그저 중요한 지위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코락흐의 반역은 모셰와 아하론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토라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 아니며, 모셰는 하쉠께서 임명한 예언자가 아니고, 그가 자기 진행으로 일을 꾸며낸다는 주장은 토라 자체의 신성한 권위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코락흐의 반역은 모든 사건 중 가장 심각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에레브 라브를 탓할 수 없기 때문도 아니고 그것이 모셰 자신의 가계 안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것은 토라 자체의 신성한 권위를 훼손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로부터 온 하쉠의 토라에 대한 믿음은 모셰를 통해 계시되었습니다.


다탄과 아비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이것을 암시했습니다: ‘... 당신이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부터 올려 광야에서 우리를 죽게 하려고 한 것이 적은 일입니까?’

그들을 미쯔라임으로부터 이끌어 낸 사람이 모셰였나요?

모셰가 아니라 하쉠께서 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들의 말은 실제로 그 일이 모셰의 계획이었다는 걸 의미했습니다.

‘당신이 당신 주도로 그것을 했다!’


모셰가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 아하론을 임명했다는 비난은 하쉠께서 이 세상에 토라를 위한 그분의 전달자로 모셰를 선택하셨다는 불변을 건드리기에 ‘토라 신앙’ 전체를 훼손합니다.


이스라엘 신앙의 기초는 기록과 구전으로 이뤄진 토라 전체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며, 모셰를 통해 하쉠으로부터 계시되었다는 것입니다.

모셰는 그저 ‘그릇’이었으나, 그는 하쉠의 그릇이자 그분의 선택이었습니다.


드바림(신명기) 33:4는 ‘모셰가 우리에게 명령한 토라는 야아코브 회중의 유산이다.’라고 말합니다.

토라의 권위는 영원하며, 하쉠 자신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그분의 영원한 증거인 토라도 변할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하쉠께서 모셰한테 주셨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으며, 드바림 4:2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내가 여러분에게 명령하는 말에 더하지도 말고 그것으로부터 빼지도 말며 내가 여러분에게 명령하는 하쉠, 여러분의 엘로킴의 명령들을 지켜야 합니다.’


모셰의 반응은 그러한 현실을 반영했습니다. – ‘코락흐의 주장이 믿어진다면 (그것은) 하쉠께선 자신을 보낸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된다면 모셰의 모든 예언과 그가 가르친 모든 토라는 한 번에 무너지고 말게 됩니다.

모셰가 개인적 이익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을 수 있다면 토라 전체는 무효가 됩니다.

그 다음 절차로는 어떤 이가 ‘모셰는 왜 안식일을 생각했을까? – 쉬는 날을 원했기 때문이다.’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이는 다른 주장과 함께 찾아올 수 있고, 그렇게 모든 사람은 하쉠의 모든 토라를 모셰의 ‘개인 발명품’으로 무시할 것이며, 그것이 하늘로부터 왔고 하쉠으로부터 온전히 주어졌다는 모든 토대가 훼손되어 궁극적으로 하쉠에 대한 믿음을 잃게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코락흐가 단순히 토라의 근원이 하늘로부터임을 부인하는 것에서 하쉠의 존재를 완전히 부인하는 것으로 바뀜을 발견하게 됩니다.


금송아지는 하쉠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에서 비롯된 실수였습니다.

그리고 정탐꾼들의 악담은 하쉠에 대한 믿음의 개념에서 비롯된 실수였죠.

그러나 모셰의 토라는 시나이 산에서 이 세상에 하쉠께서 하늘로부터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이라는 믿음이 기초가 됩니다.

그렇기에 모셰의 대답은 만약 무언가 비정상적인 일이 신성한 반응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하쉠께서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나를 보낸 분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것이라는 데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쑤프 바다가 갈라질 때 슈모트 14:31에 표현된 것처럼 모셰가 누구인지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하쉠께서 미쯔라임인들에게 행하신 큰 손을 이쓰라엘이 보고 그 백성이 하쉠을 두려워했다. 그들의 하쉠과 그의 종 모셰를 믿었다.’


람밤(마이모니데스)은 하쉠께서 토라를 주셨던 시나이 산 계시의 놀라운 사건의 목적에서 모셰가 스스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 하쉠께서 모셰에게 명령하기 때문임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분명히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설명합니다.


슈모트 19:9에서 모셰에게 말씀하셨듯, 시나이 산에서 하쉠 자신은 모셰에 대한 이 믿음이 영원히 굳어지길 원하십니다: ‘...이는 내가 너와 말할 때 백성이 듣고 또한 그들이 너를 영원토록 믿게 하기 위함이다.’


시대를 통틀어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일부는 토라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 아니며 영원하거나 구속력이 없고 새롭게 떠오르는 의제들에 맞게 수정 및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새로운 예언들이 추가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것을 수정하거나 새로운 예언이 계명들을 폐지하고 대체할 것이거나 또는 이미 대체했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모셰가 우려한 것이었습니다. 개인적인 명예나 감정에 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셰가 그토록 격렬한 반응을 보인 이유였고, 하쉠께선 이에 전적으로 동의하셨습니다.

구절은 곧바로 ‘그가 이 모든 말들을 마치자마자 그들 밑에 있던 땅이 갈라졌다. 그리고 땅이 그것의 입을 열어 그들과 그들의 집들을 삼켰으니 곧 코락흐의 모든 사람들과 모든 재산들이었다.’라고 말해줍니다.


사실, 이것은 하쉠께서 모셰에게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 그 이상이었는데, 창조의 처음부터 하쉠께선 이것을 미리 준비해 두셨습니다.

피르케이 아보트 5장에 있는 미슈나에서는, 샤바트 전야 어스름에 10가지가 창조되었음을 가르칩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코락흐를 삼킨 땅의 입이죠.


이 미슈나는 매우 심오한 가르침이고, 거기에 이름이 붙은 각각의 본질에 대한 적절한 고찰은 많은 중요한 개념들을 전달해 줍니다.

마하랄에서는 이 가르침의 본질이 토라에서의 어스름의 개념이 낮도 밤도 아닌 ‘찰나의 순간’이라는 개념을 표현하는 것으로 설명하는데, 그것은 창조의 6일처럼 세속적이고 평범하지도 않고, 샤바트처럼 거룩하지도 않은 경계의 순간을 의미합니다.


물질적 창조의 6일과 연결되는 측면에서, 그것은 물리적인 것들을 창조하기에 적합한 시간이었으며, 샤바트와도 연결되는 시간으로서 그것은 자연계의 경계 밖에 있는 것들과도 연결되는 시간이었습니다.

미슈나에 언급된 모든 항목들은 그 경계선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옆으로 빗겨가 보겠습니다.

이 가르침은 아주 오래 전 창조의 6일째의 샤바트 전야에 하쉠 자신이 코락흐와 그의 공범들을 삼키려는 분명한 목적으로 ‘땅의 입’이라는 현상을 창조하셨음을 설명하는데, 여기서 어느 때보다 더 마음을 깊이 열어보면, 이집트로부터의 탈출과 시나이 산 계시의 모든 기적을 경험한 후,만(만나)을 먹은 후, 하쉠의 진노와 정탐꾼들에 대한 그분의 명령을 목격한 후 코락흐가 도전했던 건 단지 모셰의 권위와 예언, 아하론의 제사장 직분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코락흐는 하늘로부터 온 토라라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쉠께서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부인했으며, 심지어 하쉠의 존재를 완전히 부인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전례 없는 방식으로 처벌을 받았습니다.

하쉠 자신은 그(코락흐)를 위해 자신이 창조한 땅의 입으로 그를 산채로 내려가게 했습니다.

코락흐가 거부하기로 선택한 바로 그 창조의 시작부터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거룩한 바알 쉠 토브는 코락흐의 이야기에서 배워야 할 긍정적인 교훈을 가르치는데, 그는 코락흐의 위대함에 대한 그의 열망이 그의 영적 성장과 더불어 하쉠과의 연결에 대한 그의 영혼의 열망을 반영했던 것임을 인식했어야 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 대신 그는 자신의 선택으로 자신의 자아가 그것을 차지하도록 내버려 두었고, 모셰와 아하론에게 반기를 들며, 하쉠께 다가가는 대신에 그분을 완전히 거부했고, 결국 그가 하쉠의 기원을 부정한 창조물인 혼돈 속의 공허에 영원히 갇히게 됩니다.


코락흐는 질투와 권력욕의 끔찍한 대가와, 그것이 어떻게 위험한 파멸의 길로 인도하는지를 우리에게 영원히 상기시킵니다.


모셰와 아하론은 비난과 반대와 반역에도 불구하고, 자만함 없이 겸손하고 신실했습니다.

겸손함과 목적 지향적 행동의 삶이 우리를 어떻게 거룩함에 더 가까이 이끌고 우리의 진정한 운명을 성취시키며, 영원한 토라/하늘에서 온 토라에서 자기 자신을 찾을 때 어떻게 우리의 영혼을 고양시킬지를 우리에게 영원히 보여줍니다.


라브 하임 리치만 Rabbi Chaim Richman

번역: 아담 리 (유대교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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