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파라샤트 베에특하난 '끝없는 사랑'

샬롬, 티샤 베아브를 따르는 이번 샤바트(안식일)는 좀 특별한 샤바트로, ‘위로의 안식일’이라 불리는 샤바트 낙하무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이름은 예언서를 읽는 이번 하프타라의 시작 구절로, 예샤야후(이사야) 40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의 엘로킴께서 말씀하신다.”


이 샤바트는 이제 막 시작되는 일곱 샤바트의 주기 중 첫 번째 샤바트로, ‘위로의 일곱 샤바트’라고 불립니다.

이것은 ‘희망과 위로의 예언’에 모든 초점을 맞춘 하프타라를 특징으로 하는 로쉬 하샤나(유대 신년)까지 이어집니다.


영적인 차원에서, 유대인들은 티슈레이 월의 큰 거룩한 날을 위한 준비 기간이 시작됩니다.

다음 달은 한 해의 마지막 달인 엘룰 월로서, 일 년 중 회개하기 가장 좋은 때입니다.

실제로, 유대력 ‘아브’는 알레프(א) 베트(ב)라는 철자의 약칭을 통해 ‘엘룰 바!(אלול בא): 엘룰이 온다!’라는 단어를 암시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날을 위한 준비를 시작할 때라는 것을요.

그 기간은 두려움의 날들과 심판의 시간, 용서, 그러고나서 완전히 새로운 시작의 기회가 다시 주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위로의 샤바트’는 단순한 선전 문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때에 진정으로 위로와 영적 성장의 시간에 들어갑니다.


유대인들은 비록 티샤 베아브로 절정을 이루는 ‘3주간의 애도 기간’으로 바위 협곡을 건너가는 것을 이제 막 마쳤지만, 메낙헴 아브, 즉 ‘위로하시는 아버지’란 의미로 그 본질이 바뀌려 합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마쉬악흐(메시아)는 티샤 베아브에 태어난다’라는 신비한 전통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헛된 낙관주의나 출처 없는 가벼운 일화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깊은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나 비유적으로 이해해야 하는가의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건 전혀 요점이 아닙니다.

이 개념은 티샤 베아브가 비록 ‘비극’과 동의어의 개념이지만 ‘희망’은 ‘절망’속에서 태어남을 우리의 각자 모두에게 말해줍니다.


그 파괴 자체가 바로 재건을 위한 준비입니다.

깊은 비탄에 잠긴 바로 그 때부터 구원의 과정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이번 주 토라 부분은 드바림(신명기)의 두 번째 책 부분인 3:23부터 시작되는 파라샤, ‘베에특하난’입니다.

이 부분에선 ‘열 가지의 말들(십계명)’을 다시 반복하는 것과 같은 너무도 중요한 많은 특징들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미래에 모든 나라가 함께 선언하게 될 ‘하쉠의 단일성’에 대한 선언인 믿음의 토대가 되는 선언, ‘슈마 이스라엘 – 이스라엘아 들어라’도 담깁니다.


파라샤트 베에특하난은 항상 ‘위로의 안식일’인 샤바트 낙하무에 읽습니다.

그리고 이 파라샤를 읽는 때는 일반적으로 또 다른 특별한 날과 겹칩니다.

바로 ‘자비의 아버지의 달의 15일’의 의미를 가진 투 베아브인데, 올해는 그 날이 8월 12일금요일입니다.


투 베아브는 쇼프팀(사사기/판관기) 21:19에 언급된 고대 이스라엘 명절로, 거기에서 우리는 쉴로의 딸들이 나가서 포도원에서 춤을 춘 내용인 ‘보라, 하쉠의 명절이 쉴로에서 매년 있다’라는 부분을 읽습니다.

신성한 토라의 전통에 따르면, 이 날에 하쉠의 연합의 장엄한 광채와 그의 숨김없는 사랑이 드러납니다.


유대 현인들은 거룩한 성전의 시대에 욤 키푸르(대속죄일)와 투 베아브가 ‘일 년 중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고 말합니다.

고대에는 이 날에 수많은 사건이 일어났고, 이는 신성한 사랑의 증거로 이해되었습니다.

두 가지를 꼽아보자면, 이 날은 광야의 세대에 대한 죽음의 판결이 끝나는 날이었고, 빈야민(베냐민)지파가 이스라엘 지파들과 화해를 하고 회복된 날이었습니다.

요점은, 다른 모든 토라의 지혜의 영역과 마찬가지로, 근원을 공부하고 이 날의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평생’을 공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시간에도 아브 월 15일은 ‘사랑과 결혼의 날’로 알려져 있고, 그것은 ‘하쉠의 사랑의 계시’라는 가장 높은 영적 뿌리로부터 발산됩니다.

위로의 샤바트의 합류점과 아주 잘 맞아 떨어지는 이 날의 주제는 베에특하난의 토라 부분과 다시 한 번 완벽하게 ‘신성한 동기화’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일주일 안에 일어나는 이 변화에 대한 구절, 티샤 베아브에서 투 베아브, ‘애도와 절망과 파괴’에서 ‘기쁨의 축제와 사랑’으로의 구절이 트힐림(시편) 30편에서 다비드(다윗)왕이 묘사한 바로 그 변환점입니다.

‘당신께서 제 통곡을 제게 춤으로 바꾸시며 당신께서 제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제게 띠를 동여매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잠잠히 있지 않고 제가 당신을 노래할 것이니 하쉠, 제 엘로킴이시여, 제가 영원히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트힐림 전체의 맥락 중에서 취해진 이 특별한 구절은 인간의 상태를 묘사한 것입니다.

이런 극단들을 겪으면서 ‘모든 것이 하쉠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깨닫고 그 분께 감사를 드린다는 것, 그것이 인간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열어본다면, 진실로 이 사랑의 주제는 베에특하난의 부분을 통해 깊이 퍼져 있습니다.

지난주 편에서 언급했듯, 모셰의 그의 남은 날들 동안의 모든 비평은 격려와 동정 어린 그의 책망이 ‘그의 백성을 향한 그의 사랑’때문이었으며, 그 땅에 들어가고자 하는 그의 열망에 불을 붙인 것도 ‘사랑’때문이었기에 유대인들은 7장에서 그 분의 백성을 위한 하쉠의 사랑에 대해 읽습니다.

‘너는 너의 엘로킴 하쉠의 거룩한 백성이기 때문에 너를 너의 엘로킴 하쉠께서 택하셔서 지면 위의 모든 민족들 중에 보배로운 백성으로 그의 것이 되게 하셨다. 모든 민족들보다 너희가 많기 때문에 하쉠께서 너희를 사랑하고 택한 것이 아니라, 너희가 모든 민족들보다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쉠께서 너희를 사랑하는 것 때문에, 그리고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그 맹세를 지키려고 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제 정말 가장 깊은 방법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열어보세요.

쉐마 기도의 첫 번째 단락인 6:5에서, 유대인들은 하쉠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토라는 “네 엘로킴 하쉠을 네 마음을 다하고 네 혼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을 믿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심지어 ‘그를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는다고? 사랑은 감정이잖아요!”


그럼 토라는 어떻게 감정에 관해 사람에게 명령할 수 있다는 건가요?

무슨 느낌을 가져야 할까요?


하쉠의 미쯔보트(계명들), 그의 계명들은 모두 ‘올바른 길을 선택하는 것과 선택하는 법’에 관한 것입니다.

감정이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었던가요?

나는 내 감정을 통제할 수 있나요?

토라가 이렇게 내게 ‘하쉠을 사랑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을 나에게 명령할 수 있을까요?


토라의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사랑은 인간성의 기본 요소이고, 모든 사람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토라는 유대인에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하쉠께 돌리라고 명령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힘은 자연스럽게 사람에게 심어 올바르게 활성화시키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것을 의도한 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쉠을 사랑하게 될까요?

‘너는 네 엘로킴 하쉠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토라의 명령을 고찰하며 마이모니데스는 묻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쉠을 사랑할 수 있는가?’

그는 그 구절이 계속해서 진행되는 씨프리를 인용합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이것들을 네 마음에 있게 해야 한다.’


그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토라를 묵상함으로 ‘너는 말씀을 하시고 창조를 행하신 분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토라 공부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쉠을 인식하게 하고 그래서 그 분을 사랑하게 하는데, 그것은 그 분을 아는 것이 그 분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그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미슈네 토라’에서 토라 사상에 관한 기초 부분에 마이모니데스는 다음과 같이 씁니다: “‘너는 너의 엘로킴 하쉠을 사랑해야 한다’고 토라가 말하듯이 이 위대하고 두려운 엘로킴께선 우리에게 그를 사랑하고 두려워하라 명하신다. 또한 다른 곳에서도 토라가 ‘너의 엘로킴 하쉠을 두려워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엘로킴에 대한 사랑과 두려움을 얻을 수 있겠는가?’를 묻는데, 마이모니데스는 ‘개인이 하쉠의 일과 그의 창조의 경이로움을 생각할 때 그는 창조 자체에서 그 분의 무한하고 비할 데 없는 지혜를 분별할 것이며, 다비드 왕이 트힐림 42편에서 말한 것처럼 하쉠을 사랑하고 그 분을 알고자 하는 큰 열망을 느낄 것이다’라고 답했습니다.

‘내 혼이 목마릅니다 엘로킴, 살아 계신 엘로킴!’ (트힐림 42:3)


따라서 하쉠에 대한 사랑을 얻는 또 다른 방법은 그 분의 창조를 고찰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마이모니데스는 하쉠께서 이 세상에 두 가지 방법으로 계시 되었다고 가르치는데, 바로 토라창조 자체를 통해서 임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그는 이 두 가지에 대한 고찰이 그를 사랑하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는 회개의 법에서 하쉠을 사랑하라는 계명에 대해 더 쓰는데, 마이모니데스는 “사람은 자신이 ‘내가 토라의 모든 계명을 수행하고 그 지혜가 나 자신을 차지하게 해 그것이 약속하는 모든 축복을 받고 다가올 세상에 합당하게 되리라.’”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나는 토라가 규정하는 저주로부터 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토라가 경고하는 죄로부터 거리를 둘 것이니 그럼으로 나는 다가올 세상에서 내 몫을 잃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지 말 것을 가르칩니다.


그는 설명하길, ‘이런 식으로 하쉠을 섬기는 것은 적절치 않으니 왜냐하면 이것은 하쉠을 섬기는 동기가 ‘두려움’만인 사람에 대한 묘사이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은 토라와 그 계명들이 자신을 차지하게 하고 그 지혜에 따라 행동하니 그것이 진리라는 사실 외에는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그는 이것이 매우 훌륭한 수준이지만, 모든 현명한 이가 그것에 도달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의 수준이었고, 그는 이것이 ‘너의 엘로킴 하쉠을 사랑하라’라는 계명의 진정한 의도였음을 가르칩니다.

그 말은, 내가 단지 그러해야 하니까 그의 뜻을 행할 거라는 얘기입니다.


그 수준에서 하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연스레 그 분의 모든 계명을 성취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사랑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지금까지 우리는 그 분의 토라를 통해 하쉠을 아는 것에 대해서와 그 분의 창조를 고찰하는 것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인생에서 그 어느 때보다 더 깊이 마음을 연다면, 훨씬 더 개인적인 면에서 다른 방법이 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가 제가 기꺼이 할 때로, 내 인생에서 하쉠을 볼 수 있도록 나를 허용할 때, 내 인생에서 하쉠의 손이 직접 개입한 걸 인지하는 겁니다. 그 분이 제게 보내는 메시지까지도요.

이것이 하쉠과 사랑에 빠지는 가장 효과적인 동기입니다.


그리고 ‘회개의 법칙’에서 마이모니데스는 하쉠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기록합니다.

그는 ‘그 목표는 매우 큰 사랑으로 하쉠을 사랑하는 것으로, 격렬하고 강렬한 사랑을, 그래서 개인의 생명력 자체가 하쉠을 사랑하는 것과 완전히 연결되도록 여자에게 사랑에 빠진 남자처럼 끊임없이 하쉠을 생각하고, 집착하고, 앉을 때나 일어설 때나 먹고 마실 때나 계속 그녀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것처럼 하라’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여’라는 구절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또한 쉬르 하쉬림(아가서)에서 ‘내가 사랑의 병이 들었으니’라고 슐로모(솔로몬)왕이 암시한 바와 같이 이 사랑의 비밀은 쉬르 하쉬림 전체의 기초라고 마이모니데스는 설명합니다.


우리의 축복 된 기억의 현자들, 그들은 우리가 배우는 모든 것의 위대한 마스터이자 스승입니다. 그들 모두가 하쉠께 사랑의 병에 걸렸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삶을 이끈 원동력이었습니다. 다른 건 없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입니다.


본문 구절 6:5은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혼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해 네 엘로킴 하쉠을 사랑하라’라고 가르칩니다.

라쉬는 이러한 각각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그는 설명하길, “‘마음을 다해’는 무슨 뜻인가?”

그는 ‘당신의 두 성향, 즉 좋은 성향과 나쁜 성향을 가지고’라고 합니다.

이 의미는 당신의 성격, 당신의 본성, 심지어 하쉠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악한 영향까지 그를 거부하게 만드는 부분으로도 당신의 마음이 갈라지지 않도록 하쉠을 사랑하게끔 훈련하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너희 자신을 다스려 마음의 어떤 부분도 버려지거나 다른 사랑으로 채워지지 않게 하라’입니다.


그리고 ‘네 혼을 다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그가 당신에게서 당신이 죽을 차례가 되어 영을 취해간다고 해도 당신이 여전히 하쉠을 사랑해야 하고 ‘나의 지금 순간’이 하쉠의 판결대로라는 것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힘을 다하여’라는 것은 모든 수단을 다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당신의 모든 힘, 모든 재정, 그 분의 계명을 성취할 수 있게 하는 모든 능력과 자원을 사용하라는 말입니다.


이제 이 구절을 보세요. 그리고 당신의 마음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깊이 열어보세요.

이제 그것은 매우 분명해지고, 이 구절을 간단히 읽는 것도 매우 의미가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자에게 뭐라고 하나요?

“내 온 마음을 다해 널 사랑해, 난 너를 목숨보다 더 사랑해! 너를 세상의 모든 부유함보다 더 사랑해. 돈은 문제가 아니야.”

바로 이것이 정확하게 이 구절이 의미하는 단순한 의미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혼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정확히 이와 같이 하쉠께선 우리에게 그 분을 사랑할 것을 명하십니다.


하쉠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 상황이 어떻든 그 일이 어떻게 보이든 상관없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벡홀 메오덱하(בכל-מאדך), ‘네 모든 힘을 다해’라는 단어에서 메오드(מאוד)라는 단어는 미다(מידה), 즉 모든 ‘측량’, 바로 그가 우리에게 재는 모든 측량을 의미합니다.


우리 몫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좋든 나쁘든 ‘하쉠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만이 오직 사랑임을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거룩한 라브(랍비) 아키바는 토라를 가르친 죄로 로마인들에게 고문을 받아 죽임을 당하면서도 쉐마를 암송하면서 그의 옆에 있던 제자들에게 그가 이 말을 성취하기 위해 평생을 기다렸다고 말했습니다.


‘네 모든 혼을 다하여 네 엘로킴 하쉠을 사랑하라’, 이는 ‘당신이 내 영을 취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를 의미합니다.

이 이야기도 역시 라브 아키바의 것으로, 그가 파괴된 성전의 지성소 자리에서 여우가 뛰노는 것을 보고서 동료들이 그 광경에 우는 동안 그는 웃었습니다.

그렇게 다른 현자들은 성전이 폐허가 된 동안 그가 웃을 수 있다는 걸 믿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하쉠께서 약속하셨던 ‘위로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웃었을 뿐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그들에게 “우리가 멸망의 예언이 이루어 진 것을 보았으니 위로의 예언 또한 이루어질 것이 분명하지 않소!”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대부분의 영어 성경 번역본이라는 것이 쉐마 이스라엘을 ‘들으라 오, 이스라엘! 하쉠은 우리 하나님이시니 하쉠은 한 분이시니라’라고 번역하는 걸 아실겁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아트스크롤 출판사의 번역은 완벽하게 이렇게 해 두었습니다, 읽어보자면: “이스라엘아 들어라, 하쉠은 우리의 엘로킴이시며 하쉠은 유일무이하시다.’


다른 건 없는 겁니다. 라브 아키바는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현실’이 단지 ‘하쉠’이라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모든 상황에서 하쉠을 알고 조건 없이 그를 사랑했습니다.

뭐가 어떻게 보이든 간에 하쉠은 유일무이하며, 모든 것이 오직 좋은 것을 위한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존재하는 곳’의 비밀입니다: ‘애통의 해협을 지나 위로의 샤바트 기슭으로’

이것은 진정으로 ‘위로하시는 아버지’의 달의 가장 깊은 계시이며 투 베아브의 가장 깊은 비밀입니다.


하쉠을 사랑한다는 것의 진정한 비밀이 우리의 온 마음과 우리의 온 영혼과 우리의 온 힘을 다해라는 것을요.


글쓴이: 라브 하임 리치만 Rabbi Chaim Richman

번역: 아담 리

Related Posts

See All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