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욤 키푸르란 무엇인가?

샤나 토바,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날이며 비할 데 없는 영적 능력과 잠재력이 가히 비할 데 없는 날, 1년 중 가장 거룩하며 영원의 빛을 비추는 창이 우리에게 열리는 대속죄일인 욤 키푸르, ‘용서와 갱신’의 위대한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날은 살아 계신 하쉠의 자녀이자 영원한 왕의 종으로서 흔들리지 않는 우리의 정체성을 가장 확고하게 확인하는 그런 날입니다.


무엇이 욤 키푸르를 그렇게 거룩하게 만들까요?

그 날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맞이하고 준비하며, 거기에 참여하고 그 치유를 얻을 수 있을까요?

또한 우리의 개인적인 목표들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모두가 알다시피, 로쉬 하샤나와 욤 키푸르의 명절 기도에서 ‘로쉬 하샤나에 기록되고 욤 키푸르에 봉인된다!’라고 음송합니다. 욤 키푸르에 그 판결이 봉인됩니다.


이 얼마나 곰곰이 여겨볼 벅찬 생각인가요!

우리가 생명책에 날인된다는 것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욤 키푸르는 슬픈 날이나 억압적인 날도 아니고, 기쁨의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의 갱신에 전념하고 내 실패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지고 새로운 미래를 받아들일 의향이 있다면 하쉠께서도 기꺼이 그 날인을 달콤함과 자비로서 이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토라는 이스라엘이 진실한 회개로 하쉠께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하쉠께서 바로 이 날에 이스라엘의 용서를 보증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욤 키푸르에 우리는 1년 전체를 배상할 기회를 얻습니다.

우리가 한 모든 잘못된 선택들, 우리가 낭비한 모든 소중한 시간들, 우리 삶에서 하쉠의 임재에 대한 초점을 잃었던 모든 시간에 대한 우리의 후회를 표현하는 동시에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게끔 욤 키푸르에 우리는 하쉠과의 단절이 ‘일시적’이었던 것임을 증명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이 날엔 우리의 회개의 정화 능력이 너무나도 커서, 다시 시작하길 원하는 사람은 생명책에 이름을 남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열어보세요.

는 ‘우리가 과녁을 놓치는 일시적인 광기의 순간’으로, ‘정신 착란’이란 것으로 토라에 의해 정의됩니다.


죄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인간과 하쉠 사이에 범한 죄, 그리고 우리가 동료 인간들 사이에서 범한 죄입니다.

유대 현인들은 하쉠께서 어떤 유대인이 동료 유대인에게 지은 죄를 용서하시기 전에 서로가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욤 키푸르가 1년중 가장 거룩한 날인 이유는 인간에 대한 창조주의 사랑과 동료 인간들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려면 진정으로 사랑해야 하고, 하쉠께 용서를 구하려면 자신을 진정으로 믿어야 합니다.

바로 이 날에,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방식, 그리고 우리가 하쉠을 인식하는 방식으로 저지른 모든 실수들 그 모든 것이 용서됩니다.


욤 키푸르의 힘을 통해, 우리는 말 그대로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비록 극심한 내적 혼란의 날이지만 그건 좋은 것이고, 삶의 표시이며, 거기엔 성장과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 혼란은 매우 긍정적이면서, 세상이 신성한 사랑과 용서의 큰 빛으로 물들게 될 때 기쁨의 날이 됩니다.


회개의 과정을 통해, 우리 삶의 모든 면은 완전히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이 완전한 재시작, 신성한 사랑의 선물이 그 날을 1년 중 진정으로 가장 행복한 날로 만듭니다.


티슈레이 월 10일은 모셰가 두 번째 돌판과 함께 시나이 산으로부터 두 번째로 내려온 날입니다.

그 때는 금송아지의 잘못에 대한 하쉠의 용서의 메시지를 전달한 최초의 욤 키푸르였습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놀라운 생각인 것이, 이것은 욤 키푸르가 우리의 삶에 ‘하쉠’이 누구인지에 대한 우리의 오해를 해결해 준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나쁘지만 그러면서도 바로잡을 수 있는 비극은 ‘하쉠과의 단절’입니다.

거룩한 성전이 서 있고 세상에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가 있었으며, 우리의 시야가 선명했던 시대에 욤 키푸르는 1년 중에 가장 행복한 날 중 하나로 인정 되었었습니다.


판결이 봉인되는 바로 그 날, 미슈나(미쉬나)는 예루샬라임의 어린 소녀들이 흰 옷을 입고 들판에 나가 춤을 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날은 축하의 날로, 우리 자신의 참 자아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진리를 확인하는 날로 이해됩니다.


이 특별한 날엔 이스라엘의 기도에서 우리는 대제사장이 제사에 참여하는 동안,그리고 모든 개개인이 그러한 상황에 대해 명백하게 알고 온 민족이 두려움으로 서 있는 동안 욤 키푸르가 거룩한 성전에서 ‘어땠었는지’에 대한 경험들을 나누며, 보다 깊고 실질적인 차원에서 하쉠께서 굉장히 가까이 계시고 내가 이제 과거의 실수와 잘못된 결정들에 대해 진정으로 용서를 받았으며, 진실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기회를 부여받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사람’, 즉 온 세상을 대신해 행동하는 가장 구별되고 책임 있는 사람을 의미하기에 1년 중 가장 거룩한 날에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곳인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우리가 토라에서 그렇게도 많이 배우는 삶과 시간, 그리고 공간 사이의 교차점의 완성입니다.


이스라엘은 온 민족이 욤 키푸르를 위해 거룩한 성전으로 오고 모든 사람이 함께 모여 나란히 섰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좁은 공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겨우겨우 움직이는데, 그러나 대제사장이 욤 키푸르에만 읊는 하쉠의 거룩한 이름을 말하고 그들이 하쉠의 이름을 들을 때, 모든 사람이 완전히 엎드려도 갑자기 모두를 위한 충분한 공간이 있게 됩니다.


이 엎드러짐은 얼굴을 완전히 떨어뜨리는 것으로 설명되는데, 그것은 단순히 두려움의 표시로 몸을 굽히거나 몸을 완전히 엎드리는 것 그 이상으로, 그것은 자아를 절대적으로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행위이며 의도적인 자아의 붕괴와 자신의 존재 전체를 부정하는, 하쉠께 완전히 빠져드는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왜 욤 키푸르에 금식을 할까요?

그것은 우리 자신을 ‘벌하는’ 의미가 아니라 몸과 영을 구별 짓는 것입니다.

이 날에 음식과 음료를 삼가는 것은 이 날에 우리가 천사의 영적 수준으로 올라가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적인’ 것과 멀리 떨어짐으로 그것을 초월해 냅니다.

물질주의로부터 해방되어 우리의 영적 본질과 깊이 연결되고, 영적 존재로서의 우리의 진정한 본성을 재확인 합니다.


물리적이란 것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실재가 아닙니다. 그건 주의를 산만하게 할 뿐입니다.

비로소 욤 키푸르에서 진실은 분명해지고,우리는 우선순위를 재정비할 명확성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그 날은 모두 츄바(회개)에 관련되어집니다.


일반적으로 ‘회개’라고 번역되는 히브리어 단어 츄바는 사실 돌아가는 과정의 묘사입니다.

우리 삶에서 하쉠께로 돌아가는 첫 번째 단계는 먼저 우리의 진정한 자아로 돌아가 ‘원래 우리였던’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생의 일로, 가면을 벗고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삶의 츄바는 우리의 실수를 정직하게 인지하고 인정하는 능력, 그리고 이런 실수들을 절대 반복하지 않고 변화 시키려는 강한 열망에 의해서 촉진되는 ‘발전’입니다.

사실 우리는 1년 중 언제든지 회개가 가능하고 또 해야 하기도 하며, 가급적이면 매일 회개해야만 하는데, 욤 키푸르는 그 자체가 회개를 위해 설계된 날입니다.


유대 현인들은 이 시점에 하쉠께로의 회귀가 매우 소중한 것이라고 가르치며, 욤 키푸르 날 자체의 본질적인 힘과 결합된 진실한 츄바가 ‘새로운 시작’을 보장한다고 우리들에게 약속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하쉠 자신이 바이크라(레위기)에서 그것을 보증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날에 너희를 정결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를 위한 속죄가 이루어져 너희 모든 죄들로부터 하쉠 앞에서 너희가 정결하게 되기 때문이다.’ (16:30)


위대한 현인 마이모니데스는 진정한 츄바가 4가지의 기본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가 부적절하게 행동해 왔음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것,

둘째로, 우리는 하쉠 앞에서 그 행동들을 말로 고백하고,그것을 표면화 시키고, 우리 자신의 자아의 말을 듣도록 강요하고 우리 자신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을 들음으로 인해 우리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으로, 이 고백은 긍정적인 계명이며 회개의 과정에서 절대적이고 필수적인 단계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행동에 대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미친 부정적 영향에 대한 깊은 이해로 진정한 자책과 후회를 느끼는 것,

그리고 마지막은 그 행동들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확고하고 흔들림 없는 결심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증거는 아직 오지 않습니다.

아마 욤 키푸르 이후에 올 것인데, 이전에 실패했던 것과 같은 상황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면 이번에는 결의와 결심으로 그 시험을 통과할 것인데, 마이모니데스의 말대로 ‘비밀을 아시는 분’인 하쉠 자신만이 이것이 사실임을 입증해 줄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그것은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쉠과 함께하는 이 과정은 나 자신의 진심어린 회개 외에는 어떤 것도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건 나를 대신해 다른 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 개인과 창조주 사이에는 ‘대리인’이 존재하지 않으며, 단순히 ‘입에 발린 말’이나 ‘믿음의 선언’도 충분한 건 아닙니다.

우리 각자는 정말로 변화를 만들고자 기꺼이, 그리고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욤 키푸르의 가장 놀라운 교훈 중 하나는, 인간에 대한 하쉠의 믿음에 관련한 심오한 계시입니다.

우리는 진실한 회개의 결과로 전능하신 분께서 우리 개인의 역사들을 다시 쓰신다는 것을 배웁니다.

맞습니다. 유대 현인들은 하쉠께서 진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돌아오는 사람의 개인 역사를 실제로 다시 쓰신다고 설명하며,

이 비밀은 모든 논리와 상상들을 초월합니다.


어떤 이가 두려움, 처벌, 또는 보복의 동기 등에 기초하여 회개하는 소위 ‘낮은’단계의 츄바를 이행할 때도 개인에 의해 저질러진 모든 의도적인 죄는 더 이상 의도적인 죄로 간주되지 않고 ‘의도치 않은 실수’로 하쉠께서 그 점수를 바꾸시는데, 하물며 하쉠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한 진실한 회개는 어떨까요? 하쉠께서 보시기에 그 사람의 회개는 그가 당시 그것이 죄라는 정보들을 놓치고 있었음을 증명해 줍니다.

그는 그의 삶에서 하쉠의 임재를 ‘잠시’ 잊었던 것입니다.

그 때에 지금 그가 알고 있던 것처럼 알았더라면,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일시적으로 연결이 끊겼었고,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쨌든 가장 깊은 방법으로 당신의 마음을 열어보세요. 왜냐하면 이제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회개가 ‘두려움’이 아닌 오직 하쉠만을 향한 사랑으로 인한 ‘사랑으로부터의 츄바’일 때, 하쉠께선 더욱 과감하게 그의 역사를 수정하고 그 개인의 고의적인 죄를 오히려 그의 덕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런데 더 높은 단계의 츄바인 사랑에 의한 회개는 어떻게 고의적인 죄를 ‘계명’등의 덕으로 바꿔주는 걸까요?

그렇다면 사람이 죄를 지은 후 ‘사랑으로서’회개하고 그 자신의 죄를 계명이라 부를 수 있다는 건가요?

사랑으로 동기부여 된 이 츄바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마치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나 자신이 상관 않는 것처럼 내가 당신을 잊었었다는 걸 믿을 수 없어하는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실망시켰다니 믿기지 않아요! 당신은 결코 절 실망시킨 적이 없습니다!”

사랑에 의해 동기부여 된 이 높은 츄바는 ‘돌아오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닌 ‘전진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과거를 지우고 죄를 잊는 데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에 대한 열정과 에너지를 거룩함으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츄바로, 자신의 모든 성향을 좋은 쪽으로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가 하쉠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자신의 예쩨르 토브(좋은 성향)와 예쩨르 라(악한 성향)가 모두 하쉠의 의지에 포함된다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부정성을 억누르는 대신에 매우 현명하게 자신의 성향, 그것도 심지어 부정적인 성향도 거룩함 쪽으로 향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하쉠과 자신의 본질로 돌아가는 그의 접근법은 두려움이나 무력함, 또는 건강에 해로운 죄책감 등은 없고 기쁨과 건전함, 그리고 순결함을 가지며, 그렇기에 그 죄 자체가 이 개인에게 있어 ‘거룩함의 원천’이 되어줍니다. 그는 자신 안에 능력과 에너지가 있음을 밝히고, 부정적인 경험을 통해 거룩함을 위해 자신의 본성 안에 내재된 능력과 에너지를 사용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렇게 죄가 덕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의 회개는 강력한 영적 상승의 행위가 되고, 이 모든 일을 겪지 않고서는 자신이 지금에 다다를 수 없었음을 가장 깊은 수준에서 깨닫습니다. 그의 길은 궁극적으로 ‘좋은 것’이었는데, 그것이 그를 하쉠께로 데려오는 데에 관한 모든 도구가 되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개인이 하쉠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동기부여 된 더 높은 단계의 츄바에 참여하는 공로가 있을 때, 그의 고의적인 죄들은 실제로 ‘젝후트’, 바로 공로 또는 덕으로 간주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죄가 마치 ‘결코 없었던 것처럼’ 삭제 버튼을 누른다는 의미 그 이상입니다.

이것은 가장 건전하고 유익한 방식으로 죄의 회개에 대해 진정한 토라의 이해를 보여주는 ‘신성한 재교정’입니다.


자, 들어보세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는 모든 것, 심지어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들도 모두 하쉠의 계획의 일부이며 우리가 결국 그 분께 돌아가는 것에 대해 도움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과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 한, 그리고 더 나은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우리가 우리 삶에 허용했던 모든 부정적인 것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하는 이 모든 경이로움을 얻고자 한다면 욤 키푸르에 한 순간도 그냥 허비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침착해야 하며, 지금 이 순간에 있어야 하고 다시 시작하기를 원해야 합니다.


그러니 이제 가장 깊은 방법으로 마음을 열어보세요.

그것은 ‘난 신을 믿는다’같은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인정하든 안 하든 신을 믿습니다.

그것이 ‘난 신을 믿는다’로, 나는 그가 나를 사랑하고, 나를 믿고, 나를 용서하고,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음을 믿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다는 것 등입니다.


그러나 욤 키푸르는 ‘인간을 믿는 하쉠’에 관한 것입니다.

문제는, 하쉠께서 우리를 위해 그런 일까지 하실 만큼 충분히 우리가 믿음직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우리 자신을 믿는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실질적인 시험입니다.


욤 키푸르의 하루가 끝날 무렵 해가 지기 직전엔 ‘네일라’라고 하는 특별히 추가 된 다섯 번째 기도가 있습니다.

네일라는 ‘닫음’ 또는 ‘잠금’을 의미하는데, 하루 중 가장 뜻 깊은 시간이며 너무 강력하고 중대하게 느껴지는 시간입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하루 종일 서서 금식하고 기도에 많은 에너지를 쏟으며 정말로 쇠약해졌다고 느껴도 우리는 모든 힘을 모읍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알고 있거나 적어도 이것은 모두가 생각하는 것인데, 네일라 기도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하늘의 문이 막 닫히려고 할 때 하쉠께 부르짖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건 그럴 수도, 또는 아닐 수도 있지만, 사실 이 가장 거룩한 순간에는 ‘잠금’이란 것에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각자가 하쉠과 완전히 독대하여 함께 ‘갇혀’ 있고, 그 때 그 분께서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시며 새해를 축복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쉠께 말합니다. ‘나를 홀로 가두지 말고 당신과 함께 가둬주세요.’


부디 올해는 달콤함과 선량함의 축복이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부디 모든 분노와 상처와 원한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깨끗이 씻어내길 바랍니다.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 하쉠께로 돌아가길, 그리고 용서를 구하면서 다른 이들을 염두에 두고, 욤 키푸르를 통하여 완전히 새롭게 되고, 서로에게 마음을 열며 하쉠의 형태대로 창조된 인간으로서 우리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한 해가 되길, 우리가 생명책에 기록되고 봉인되길, 아멘.

Related Posts

See All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