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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샤트 이트로 5783 '영원한 시나이 산'

샬롬, 이번 주 파라샤트 이트로의 토라 부분에선 창조 자체의 목적 못지않게 성취된 것이 있습니다.

‘마아마드 하르 씨나이’라는, 시나이 산의 계시로 알려진 부분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쉠께선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고 그들에게 그분의 토라를 물려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모든 인류를 위해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스스로 토라의 책임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이 일회성 사건을 통해 수백만 명의 사람들로 구성된 한 민족이 창조주의 ‘계시의 증인’으로 섰습니다.

그들은 함께, 한 사람처럼 연합하여 예언적 비전의 수준으로 올라갔고, 하쉠의 실재를 경험했습니다.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쉠의 음성을 듣고도 산 자가 있느냐?’라고 모셰는 후에 드바림(신명기)에서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은 하쉠만이 계시다는 것을 알기 위해 그분 외에 다른 이가 없다는 것이 보여졌다.’


세계 모든 민족의 유익을 위해 모든 말씀들이 70개의언어로 들렸으며, 하쉠께서 토라를 주실 때 전 세계는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새도 날지 않았고 동물들도 소리를 내지 않았으며, 바다의 물결이 그치고 온 세상이 잠잠했습니다.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짐에 따라 모든 피조물은 조용해졌고 백성들은 천둥소리를 듣고 번개를 보았는데, 이는 하쉠께서 ‘나는 하쉠, 너의 엘로킴이다’라고 선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매우 중요하고, 그 세부 사항이 우리 존재의 중심이 되기 때문에 토라는 드바림 4장에서 보듯 유대인의 삶에서 매일 그것을 기억하라고 명령합니다.

‘너는 오직 주의하고 너의 혼을 잘 지켜야 한다. 너는 네 눈이 본 그 일들을 잊지 말고 너의 사는 모든 날들 동안 너의 마음으로부터 그것들이 떠나지 않도록 하며 너의 아들들과 너의 후손들에게 그것들을 알려야 한다.’


이번 안식일에 이 부분을 읽을 때면 우리는 지금 시나이 산 기슭에 서 있는 것과도 같게 됩니다.

그러나 진실은, 우리는 항상 거기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어보세요, 하쉠께선 시간 밖에서 있습니다.

이건 모든 영적 문제에 관한 규칙입니다.

시간은 우리를 위해서지 그분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저는 여러분이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 듣기를 바랍니다.

이건 한 번 일어났던 일, 즉 하쉠께서 이스라엘과 만났고, 시나이 산에서 토라를 준 일이 지금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항상, 그리고 영원히요.

이것이 바로 ‘하쉠께선 계시고, 계셨고, 항상 계실 것이다’라는 표현의 비밀입니다.

실제적인 측면에서 이것이 의미하는 가장 중요한 건 우리 자신의 삶에서 토라를 받아들이는 결과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미드라쉬는 미래에 태어날 운명의 모든 영이 시나이 산에 있었다고 알려줍니다.

왜죠? 이 강한 가르침의 비밀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 부분이 실제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우리 각자가 짊어지고 있는 큰 책임입니다. 신성한 계시의 매우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특별한 부분을 활성화 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겁니다: 책임을 지는 것은 ‘정직한 사람’과 ‘그냥 따라가는 사람’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책임을 지려는 의지가 없다면 개인의 성장 및 발전 능력, 목표 설정, 달성 능력 등이 제한됩니다. 심지어 지치기도 하지요.


우리 세대는 무책임 증후군을 앓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어리석은 물질주의와 사이비 성공이라는 외적인 덫에 걸려들고, 그 책임의 책임을 다른 이들에게, 나 아닌 다른 이들에게 전가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그들은 이 삶에서 잘못된 모든 것이 다른 이들의 잘못이라고 진정으로 믿습니다.

심지어 하쉠의 잘못이라고도 하죠. 그러나 확실히 ‘내 잘못’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진실은, 마음을 열어보세요. 우리는 이것이 매우 뿌리 깊고 매우 기본적인 인간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건 에덴 정원의 첫 사람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기본적입니다.


하쉠께서 에덴에서 아담에게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를 너가 먹었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아담은 책임을 회피하고 대답하길 ‘당신께서 주신 여자가 그 나무를 제게 주므로 제가 먹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는 하바에게 책임을 돌렸죠.

그리고 하바도 마찬가지로 하쉠께 ‘뱀이 저를 꾀었으므로 제가 먹었습니다.’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 각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지식 나무의 죄는 자신과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거부하고 또 거부하는 얽힘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기억할 예언자 요나는 니느베 사람들에게 자신이 전달할 것으로 주어진 예언의 임무를 받는 걸 전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요나서 1:3이 ‘그가 야포로 내려가서 타르쉬쉬로 가는 배를 발견하여 그것의 삯을 주고 하쉠 앞으로부터 타르쉬쉬로 그들과 함께 가려고 그것으로 내려갔다.’라고 우리에게 말하듯, 그는 분명 그 계획이 효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에스테르 왕비도 같은 증후군을 앓았고, 그녀에게 맡겨진 역할에 반대하며 모르덱하이(모르드개)에게 말합니다. (에스테르 4:11)

‘왕의 모든 신하들과 왕의 지방들의 백성이 알지만, 불리지도 않았는데 안뜰로 왕에게 들어가는 모든 남녀에게 한 법이 있는데 그것은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왕이 그에게 금규를 내밀면 그는 살 수 있습니다. 저는 지난 30일동안 왕에게 들어오라는 부름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에스테르 왕비는 백성을 위해 책임지고 행함으로써 영원히 기억될 만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예언의 수준과 겸손함 및 하쉠과의 친밀도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모셰조차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서 일주일 동안 서서 기도했습니다.

슈모트(출애굽기/탈출기) 4장에서 그는 하쉠께서 그에게 주신 사명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우리가 기록에서 볼 수 있듯 ‘자신’은 그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고자 다양한 변명과 이유를 댑니다.

‘모셰가 하쉠께 말했다. ‘‘제가 간청하니, 주님, 저는 말들을 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제도 그제도 당신께서 당신의 종에게 말씀하시고 나서도 그렇습니다. 이는 제가 입이 둔하고 혀가 둔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


토라는 왜 이 모든 것을 우리와 공유할까요?

토라는 정직하고 실제적이며, 우리가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도록 가장 위대한 사람들의 결점과 실수를 결코 숨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통해 이것이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지는 결함’이며, 가장 큰 것과 가장 작은 것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을 한 번 열어 보시면, 여기서 가장 깊은 비밀은, 이 세상에 태어날 모든 운명의 영은 아담의 위대한 영에 포함되어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책임을 져야 하는 교정인 티쿤은 인간 존재의 근본이 됩니다.

그것은 매우 개인적인 방식으로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데, 모든 사람이 붙잡아야 할 기회, 즉 인간 상태의 지속적인 치유에 대해 각자가 참여하는 것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기회를 가지는 것입니다.


시나이 산의 계시에서, 하쉠께선 이스라엘에게 토라만 주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그분의 뜻을 이행할 사명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토라의 글자는 창조주의 뜻으로 옷 입습니다. 모든 정확한 세부 사항에 대한 토라의 계명은 그 분의 뜻을 나타내죠.

하쉠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그를 ‘창조의 동반자’로 만들어 줍니다.

그 파트너쉽은 우리 자신의 삶이 취하는 방향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큰 책임을 전달해 줍니다.

토라 전체가 시나이 산에서 이스라엘에게 온전히 남겨졌습니다.


‘모셰가 토라를 받아 예호슈아에게 주었다’에서와 같이 ‘모셰가 토라를 받았다’라는 표현은 우리가 피르케이 아보트의 첫 장에서 발견하는 것처럼 그가 내적 차원과 모든 계명의 세부 사항을 받았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기엔 모셰에게 시나이 산에서 하쉠으로부터 가르쳐진 ‘할락하’로 알려진 진행 중의 과정도 있습니다.

유대 현인들은 이러한 개념에 대해 설명하면서, 모든 미래 세대를 통해 시간이 끝날 때까지 말하게 될 토라 지식에 대한 모든 질문과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이미 시나이 산에서 모셰에게 주어졌다고 설명합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앞으로 말해질 모든 것도 이미 말해진 것입니다.


우리는 성실하고 근면하게 토라를 공부하는 모든 사람이 그들의 영적 뿌리에 따라 토라의 몫을 가짐을 압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이미 언급되어 있다는 것은 새롭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라는 게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걸까요?

모든 것이 이미 모셰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토라를 공부하는 모든 개인의 몫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거룩한 람할은 이 신비로운 의미를 아름답게 설명해 줍니다: 그는 모든 학생이 표현했던 ‘새로운 통찰’이 이미 시나이 산에서 모셰에게 주어졌다는 생각이란, 만약 진정으로 어떤 것이 토라의 일부라면 그것은 시나이 산과 모셰의 비밀의 일부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밝혀질 것이라는 걸 의미한다고 기록했습니다.


시나이 산에서 있던 일에서 이스라엘에게 계시된 부분은 그때 그들이 받을 자격이 있는 부분이었고, 모든 세대에서 특정 시대의 토라 학자들과 학생들을 통해 그 세대의 공로에 따라 드러나는 부분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전에 말하기 시작한 것, 여전히 진행 중인 사건으로서 시나이 산의 계시의 영속성을 표현하는 놀라운 개념입니다.

하쉠께선 여전히 이스라엘에게 토라를 주고 계십니다. 그분은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모든 세대에서 토라의 끊임없는 새로움이 됩니다. 모든 세대에서 그 특정 세대와 관련된 모셰의 토라의 또 다른 부분이 계시됩니다.


람할은 계속해서 큰 비밀을 밝히는데, 그는 각 사람이 토라에서 자신의 몫을 취한다고 가르칩니다. 시나이 산의 과정은 그렇게 진행 중입니다.

각 영들은 세상에 와서 자신의 몫을 드러낼 때까지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와서 자신의 몫을 밝히려고 노력하지 않는 자는 토라를 불완전하게 했다는 것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각자는 토라의 개별적이고 특별한 부분을 활성화 시켜야 할 개인적인 책임들이 있습니다.

바로 실현되지 않은 잠재력의 영역을 현실화하여 현실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여기서 가장 깊은 비밀을 위해 가장 깊이 마음을 열어보세요.

이번 주의 파라샤트 이트로에서 하쉠께서 토라를 주실 때 19:18은 ‘베하르 씨나이 아샨 쿨로’라고 말하는데, 이 히브리어 단어들은 ‘시나이 산 전체가 연기로 가득했다’를 의미합니다.

하쉠께서 ‘불 가운데서’ 강림하셨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아리잘은 산 전체가 연기로 가득했다는 이 ‘아샨’이라는 단어에 깊은 비밀이 담겨 있음을 밝힙니다.

‘연기’라는 의미의 아샨은 아인(ע), 쉰(ש), 눈(נ)의 세 글자로 구성되는데, 이것은 공간, 시간, 삶을 의미하는 올람(עולם), 샤나(שנה), 네페쉬(נפש)라는 세 단어의 약자이기도 합니다.

토라를 통한 인류의 교정 작업에서, 우리의 역할은 특별한 시간과 특별한 장소에서 사람의 행동/그의 활성화 된 네페쉬/생명력이라는 다음의 세 가지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합니다.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토라는 하쉠의 끝없는 빛의 조명입니다. 그 빛은 우리 모두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하쉠께서 우리 각자를 위해 가져오는 올람/샤나/네페쉬의 특별한 상황을 통해 나타나죠.

산은 온통 연기였고, 아샨이란 글자는 시나이 산에서 인간에게 토라를 주신 하쉠의 계시가 시간/공간/생명의 그릇을 통해 끊임없이 나타난다는 암호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특별한 시간과 장소에 있는 우리의 특별한 영이 토라를 스스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공부는 새로운 것을 드러내 주는데, 잠재적으로 모셰에게 계시되었었지만 토라가 주어진 이래 들어본 적이 없던 것들입니다.

이것은 우리 각자가 근면과 헌신으로 토라를 공부하고, 그 길을 걷고, 그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의 가장 깊은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토라의 고유한 부분을 이 세상에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이 됩니다.


여기서 그 어느 때보다 깊이 마음을 열어보세요.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시나이 산의 사건인 토라의 계시를 완성시킵니다.


유대 현인들은 히브리어 ‘이쓰라엘’이 줄임말로 ‘예쉬 쉬쉼 리보 오티오트 라토라’라는 단어의 약자로, 토라에 600,000개의 글자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 60만 글자는 이스라엘의 60만 명의 영적 뿌리에 해당합니다.

각 영들은 하쉠의 빛에 대한 개인적 계시인 토라에 있는 글자입니다. 그리고 그건 엄청난 책임입니다.


모든 개개인은 특별합니다.

‘똑같은 사람’이란 없고, 각자는 자기의 친구들에게 없는 특별한 자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각자는 창조의 오케스트라에서 자신의 음을 연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고자 우리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거짓된 겸손이 꿈틀거릴 자리는 없습니다.

유대 현인들은 가르칠 때 이 모든 것들을 염두에 둡니다.


다음은 하쉠의 위대함에 대한 증언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의 주형을 사용해 여러 개의 동전을 주조합니다. 그들은 모두 같은 이미지를 지니고, 하나의 동전은 다른 하나와 똑같죠. 그러나 하쉠께선 각 사람을 아담의 외관으로 창조하셨으나 각각 다르게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각 사람은 ‘나 때문에 세상이 창조되었다’라고 말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나를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세상이 나를 위해 창조되었다’라는 것은 내가 어떤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음도 의미합니다. 여기서 할 일이 있는거죠.


그러나 시나이 산에서 이스라엘이 받아들인 집단적 책임은 민족주의의 경계를 넘어 보편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하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세상과 모든 인류에 대한 책임과 관심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은 매일 아침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늘 저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쉠의 단일성을 위한 것이기를 바랍니다. 나의 좋은 행동이 저울의 균형을 유리하게 하여 온 세상의 자격을 (당신 앞에) 크게 하기를 바랍니다.’


이번 파라샤에선 우리는 역사상 가장 대단했던 우상 숭배자 제사장이자 부와 지위를 가진 사람인 이트로를 만납니다. 그러나 그는 큰 헌신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광야로 나가서 창조주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토라에서 그의 몫을 받은 후 토라의 메시지를 그의 동족들에게 전하는 책임을 맡습니다.


일생을 통해서, 각 개인은 독특하고 개인적인 방식으로 신성하게 지정된 이 책임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기회를 지속적으로 부여받습니다.

하쉠께선 통과할 수 없는 방법으로 사람을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유대 현인들은 가르칩니다. 그러나 책임을 받아들인다는 건 확실히 시험을 제시하고, 때로는 지금까지 개발되지 않은 헌신과 이타심이라는 내적 차원에 접근해야 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책임을 받아들이려는 우리의 의지는 우리의 삶을 영적 성취의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려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수준까지로요.

우리는 엄청나게 가려진 시대에 살아가고 있지만, 하쉠의 임재가 감춰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드러내야 할 것은 바로 여기에 있으며, 궁극적 구원의 새벽은 이미 지평선을 밝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우리는 이전 세대보다 훨씬 더 극적인 선택에 직면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창조의 기초는 인간의 자유 선택이고, 우리의 선택은 다음 세대에 영향을 미칩니다.

안팎으로 옳고 그름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맹위를 떨치는 우리가 하는 모든 움직임에 표현되는 싸움입니다.

이 전투의 부정적인 결과는 인류를 통째로 삼킬 위험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묻고 적극적인 역할을 자제한다면 인류의 쇠퇴에 대한 책임은 우리 각자에게 있게 됩니다.


우리에겐 아주 오래된 영이 있습니다. 우리는 시나이 산에 있었지만 지금은 우리 영의 사명과 연결하고 토라에서 우리 몫을 밝히며, 우리 자신과 이 세상의 운명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고 세상에서 하쉠의 빛, 계시의 일부가 되어 살아갈 차례입니다.


라브 하임 리치만 Rabbi Chaim Richman

번역: 아담 리 (유대교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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