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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샤트 바예라 5783

샬롬, 이번 주 바예라의 토라 부분은 베레쉬트(창세기) 18장에서 시작해 세 천사가 아브라함과 싸라(사라)를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 방문 중에서 부부는 모든 역경과 육체적 불가능의 영역을 넘어 내년 이 맘 때 싸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신성한 약속을 받게 되며, 이 부분은 22장에서의 아브라함의 마지막이자 가장 큰 시험인 ‘이쯔학크(이삭/이사악)의 결박’, 히브리어로 아케다트 이쯔학크, 또는 간단히 아케다, 즉 ‘결박’으로 알려진 사건으로 끝이 납니다.


아브라함과 싸라가 모든 일을 겪은 후 마침내 하쉠의 약속대로 노년에 아들을 낳게 되는데, 22:2를 보면 ‘그가 말씀하셨다. “네 아들 너가 사랑하는 네 외아들 이쯔학크를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너가 가라. 그리고 내가 네게 말하는 산들 중 하나에서 올림제물로 그를 올려라.”’라고 말합니다.


이쯔학크의 결박에 대한 시험은 토라적 사상의 강력한 주제가 됩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의식에 영원한 영향을 미쳤고, 그 시험에서의 아브라함의 성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원한 메리트로 간주됩니다.


히브리어에선 시험의 개념을 ‘니싸욘’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시험하는 하쉠의 주제는 토라에 여러 번 나타나는데, 슈모트(출애굽기/탈출기)에서 시나이 산 계시와 만(만나)을 모을 때 하쉠께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그들을 시험하신 다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토라에 시험이란 개념이 등장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토라에서 어떤 개념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그 비밀이 드러나는 곳이라는 원리가 있습니다.

아마도 이쯔학크의 결박은 ‘우리의 삶의 과정에서 하쉠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시험의 목적이 무엇일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럼 이제 마음을 열어보세요.

하쉠께서 자신의 창조물에 대해 악의적이었다고 한 순간도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쉠께서 우리에게 보내는 시험들은 우리를 놀리거나 괴롭히려는 그 분의 방법이 아닙니다.


그분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은 아무리 큰 은폐가 있더라도 궁극적으로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고, 궁극적으로 그분의 자비의 표현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직면하는 시험이 하쉠의 계획의 일부라는 것을 압니다.


이니셜 람할’로 알려진 위대한 라브 ‘모쉐 하임 루자토’는 개인의 영적 발전에 관한 그의 고전적 저서인 ‘메씰라트 예샤림’을 소개하며 한층 더 나아갑니다.

람할의 말에 따르면,사람은 하쉠의 계명을 성취하기 위해 이 세상에 창조되고 배치되며, 또한 시험받기 위해 그러합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람할은 실제로 사람이 창조된 두 가지 목적 중 하나가 시험을 받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이 세계관에서도 예외는 아니며, 우리가 보지 못한, 우리가 싸워야 하는 특이한 불편함도 아니고 시험을 견디고 통과하는 것은 오히려 이 세상 사람의 주요 임무 중 하나인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우리에게 ‘맞춤형 시험’을 제공하게 하기 위해 하쉠의 가장 높은 지혜에 따라 의도적으로 창조된 것들입니다.


그럼 이제 한 번 물어보죠,이 시험의 의미들이 다 무엇일까요?

누구를 위한 것이란 말입니까?


결국엔, 신은 ‘사람을 알고자’ 사람을 시험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엔 하쉠께 놀라울 일도 없고 새로운 정보라는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시험 중의 시험’인 이쯔학크의 결박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 개념을 더 깊은 수준에서 이해하게끔 시도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 시킵니다.


그리고 가장 깊은 진리는, 시험이란 것이 ‘하늘이 준비한 도전’이라는 것입니다.

개인에게 주어진 도전은 그에게 지금까지 한 번도 드러난 적 없는 잠재된 강점을 그 사람에게 드러내 알리기 위함입니다.

그것들이 필요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단지 그것을 표현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순간’에 살고 현재 상황의 요구에 따라 행동합니다. 해서 우리의 응답은 현 순간의 현실을 기반으로 합니다.

육체적인 차원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실제로 큰 힘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그 힘을 사용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적이 없어 그가 진실의 순간까지 자기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조차 모릅니다.


이건 우리의 영적 삶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사람에겐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내면의 자질이 있는데, 여기서도 개인은 자신이 이러한 강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조차 완전히 인식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토라의 ‘니싸욘’ 개념입니다.


시험을 통해서, 하쉠께선 지금까지 휴면 상태였던 강점과 능력을 요구할 필요가 있는 상황에 사람을 배치시킵니다.

그것들은 잠재력으로서만 그 조립도의 일부였고, 전에는 이러한 특성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전엔 사용해오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그런 강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조차 안 해봤을 것인데, 그는 문자 그대로 자신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결코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시험은 이렇게 예상 외로 성공적으로 양질의 표현을 제공하며 시험을 통과한다는 것은 그러한 강점이 항상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시험이 인간 창조의 기초적인 측면이라는 람할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숨겨진 강점을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세상 자체가 우리의 잠재력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우리가 온 존재로 하쉠을 섬길 수 있도록 하기 때문에 우리의 시험은 창조적 구조에 만들어져 박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살아가면서 많은 도전에 직면하고, 때로는 개인이든 가족이든, 사회나 국가든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위기의 시기에 우리는 일반적으로 우리 내부에서 찾지 않는 자산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는데, 이 시대를 나쁘게 보고 묻기 보단 ‘하쉠께서 나에게 왜 그러실까?’를 묻습니다.


도전 과제라는 것은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가장 깊은 힘을 드러낼 기회가 우리가 발전되기 위해 우리에게 부여되었음을 깨닫는 겁니다.

그래서 하쉠께서 아브라함에게 한 번도 활성화된 적 없는 그의 인격의 내적 특성을 불러낼 기회를 주기 위해 아케다 시험을 계획하셨다면,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어떤 특성에 대해서였을까요?


모두가 알다시피, 아브라함의 특성은 헤쎄드, 즉 ‘친절’의 특성이었습니다.

그리고 토라는 그런 그를 단독적으로 이 세상에 하쉠에 대한 믿음을 도입시킨 최초의 신자로 식별합니다.

그는 처음부터 이 믿음을 보여 주었었고, 하쉠의 지시에 따라 그의 고향, 아버지의 집, 그리고 그에게 친숙한 모든 것을 떠나 미지의 땅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길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하쉠에 대한 믿음과 지식을 가르쳐 주면서 주저없이 이 일을 해냈습니다.


우리는 앞서 세상을 창조하신 하쉠의 은혜에 대한 사색을 통해 아브라함이 창조주를 ‘발견’ 했던 것이며, 그가 창조주를 모방해 자신의 ‘신성한 봉사’로 꾸준히 매달렸던 것이 은혜의 속성이었음을 함께 배웠습니다.

한 마디로, 아브라함은 사랑에 관한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쉠과 아브라함은 ‘사랑의 관계’를 가졌으며, 또한 지난 주 편에 우리가 예샤야후(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배웠듯이 (41:8), 하쉠께선 ‘내 사랑하는 아브라함’이라고 그를 증거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사랑에 빠져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하쉠께서 지시하신 모든 것을 완고하게 따랐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그의 삶에서 나타내지 않은, 표면으로 불러내기 위해 그가 꺼내야 할 다른 능력이 무엇이었단 말인가요?

하쉠 자신께서 우리에게 거의 설명되지 않는 것 같은 이상해 보이는 진술로 우리에게 답을 제공하는데, 아브라함이 그 결박으로 자신을 증명할 때 전능자께선 22:12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나는 너가 엘로킴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브라함은 하쉠을 위해 그가 알고 있던 모든 것을 뒤로 하고, 홀로 서고, 세상의 우상 숭배에 맞서는 모든 일들로 용광로에 던져졌었습니다.

하쉠께선 지금까지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는 것인가요?

그런데 그 분께서 ‘이제 나는 너가 엘로킴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경력의 모든 면에서 빛났던 것, 특히 최대치로 드러난 것은 하쉠에 대한 아브라함의 사랑의 수준이었습니다.

그것이 그가 그분을 따르게 하고 모든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두려움을 증명할 기회가 주어지진 않았었는데, 물론 하쉠에 대한 사랑과 두려움의 수준 차이는 이해의 여러 수준처럼 복잡한 것입니다만, 지금 논의하는 목적에서 하쉠의 사랑과 두려움에 대한 이런 개념 사이의 주요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이제 가장 깊은 방법으로 마음을 열어보세요.

아브라함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의 사랑이 자신을 하쉠과 연결시키고 하쉠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에 완전한 공감으로 관계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친밀한 지식과 같은 하쉠에 대한 사랑의 수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쉠을 두려워 한다는 의미인 ‘이르아트 하쉠’의 측면은 그의 영혼에 울려 퍼지지 않았던 어떤 것, 그와 동일시 할 수 없던 그의 이해를 초월한 어떤 것을 나타냈습니다.

하쉠을 두려워 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하쉠의 뜻을 행하는 그에 관련된 것을 의미하는데, 따라서 사람이 측정되는 건 ‘하쉠에 대한 두려움’의 측면을 통해서입니다.


아브라함은 평생에 걸쳐 하쉠에 대한 사랑에 뛰어난 자였고 그것이 그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으며, 그는 그러한 사랑의 관계에서 하쉠과 매우 가까움으로 모든 토라의 가장 깊은 의미를 이해하고 모든 계명이 주어지기도 전에 지켰습니다.

이것은 이제 유대 현인들이 질문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선생이 없이 어떻게 토라를 공부했다는 것인가? 누가 그를 가르쳤는가?

여기에 대한 비밀은 그의 두 콩팥이 그의 스승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토라의 가장 깊은 진리는 그의 존재 안에서 매우 깊은 수준으로 울려 퍼졌고, 그것은 마치 샘이 솟아난 것과 같은 직관적인 지혜였습니다.

그는 하쉠과 동일시 됨으로 사랑으로 모든 것을 스스로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그의 수준이었으며, 그것은 모두 하쉠에 대한 그의 큰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은 평생에 걸쳐 하쉠을 사랑하는 데 탁월했습니다.


그러나 이르아(두려움)를 표현하는 그의 능력, 하쉠에 대한 두려움은 그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계명을 이행하는 것에 해당했으며 그것은 사실 그의 본성과 반대되는 의미였습니다.

그는 그런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검증된 적도 없고 그 힘을 불러낼 기회도 없었습니다.


이전까지는 하쉠의 뜻에 완전히 얽매여서 아무리 어려웠어도 하쉠께서 명령하시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여왔습니다.

그래서 그를 위한 진정한 시험이 될 수 있던 유일한 것은, 잘 들으세요, 그것은 하쉠의 뜻이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친절의 본성과 모순될 뿐만 아닌 어떤 무언가로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쉠 자신이 그것(이쯔학크의 결박)을 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무슨 시험이 이러한가요? 내가 잘 아는 당신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나에게 명령할 수 있나요?’


그럼 정말로 하쉠께선 왜 그것을 명령하셨을까요?

하쉠께선 하쉠 자신이 이것을 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셨기에 아브라함이 그 명령과 관련될 수 없다는 걸 아셨으나 그분께선 그것을 명령하셨는데, 그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아브라함이 그의 수준을 증명할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의미가 없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쉠의 말씀이었고 그는 그것을 성취하고자 전심을 다했습니다.


트힐림(시편) 11:5에서 다비드 왕은 ‘하쉠께서 의인을 시험하신다’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쉠께선 의인만을 시험하고 한계를 뛰어넘도록 부추기는 한편 평범한 이들에겐 아무런 도전 없이 평안한 삶을 살도록 내버려 두신다는 걸까요?

우리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으로 이 구절의 의미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하쉠께선 모든 사람을 시험하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모든 것들이 매우 자연스럽다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온갖 어려움을 겪는데, 매일 크고 작은 시련에 직면합니다.

어떤 더 아픈 시련은, 우리에게 고통과 괴로움을 유발하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일을 처리해야 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데 그 순간의 우리 삶은 하쉠의 임재에 초점을 맞추고 그 분께 계속 붙어있을 수 있나요?

어떤 시험들은 좀 더 미묘해서, 우리가 실제로 일이 잘 풀린다고 여길 때 직면하는 도전들은 일이 ‘너무 잘 풀릴 때’ 모든 축복이 발산되는 하쉠으로부터 등을 돌리며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도 등을 돌리기도 합니다.

그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일상적인 삶’이시험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일상적인 삶의 사건을 통해 시험을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쉠과 완전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온 것임을 알고 결코 그것을 잊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하쉠께선 아브라함이 직면한 수준의 도전, 하쉠의 의지와 동떨어져 보이는 것 같은 다른 종류의 시험을 하십니다.


그리고 제가 탐구하고 싶은 또 다른 지점은

그의 아들 이쯔학크를 바치라는 하쉠의 명령이 하쉠께서 이미 그에게 주신 명백한 약속, ‘이쯔학크를 통해 네 씨라 불릴 것이라’와 정반대라는 것입니다.


하쉠께선 어리둥절하고 혼란스러운 현실을 만들어 냄으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그것은 다른 누군가, 제 3자가 와서 아브라함을 의심하게 만드는 어떤 새로운 요소의 도입과도 같지 않습니다. 이 의심의 근원은 하쉠 자신으로부터였습니다.


하쉠께선 계산되지 않을 방정식을 아브라함에게 제시했습니다.

그러한 당혹감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완전히 무너뜨릴 정도로 큰 규모의 실존적 위기를 초래할 만했습니다.


그가 이쯔학크가 그의 가문을 계속 이어갈 것이라는 하쉠의 이전 약속을 믿는 이상 그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에 어떻게 순종할 수 있나요?

그가 순종한다면 어떻게 이전의 약속을 계속 믿을 수 있을까요?

이것을 아브라함의 마음 안에서 대체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까요?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인데, 그에 대한 답은, 바로잡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케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리야 땅으로 갔으며, 그는 이전 명령과 정반대였음에도 불구하고 하쉠의 이전 약속을 계속 믿었습니다.

그는 하쉠의 완전한 뜻에 대한 단순한 믿음을 더 강화시켰습니다.


그는 모순을 무시하고 ‘이쯔학크를 통해 네 씨라 불릴 것이라’는 하쉠의 약속을 계속 믿었습니다.

그는 아케다를 위해 나아가면서도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깊이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하쉠의 뜻을 의심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그는 시험에서 승리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부정하거나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직면한 모순을 완전히 알았으며, 그것을 고치지도 못했으나 자신이 의심하는 것 만큼은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예샤야후 예언자가 55장에서 ‘내 생각들은 너희 생각들과 다르며,내 길들은 너희 길들과 다르니 (하쉠의 말씀)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처럼 내 길들이 너희 길들보다, 내 생각들이 너희 생각들보다 높기 때문이다’라고 표현한 바와 같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해했으나,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믿음은 지성의 한계를 초월하기에 그는 의심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거룩한 바알 쉠 토브의 가르침처럼, 하쉠을 섬기는 첫 단계는 복종입니다.

유대인들은 대답할 수 없는 질문과 의심이 있을 때에도 그것들을 정복하고, 그것이 믿음을 파괴하도록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단순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나 나는 하쉠을 믿으며, 나는 모든 것이 좋은 것을 위해 있다’고 믿습니다.


이번 파라샤에서 이쯔학크를 결박한 아브라함의 시험 이야기는 22:1에서 시작됩니다.

‘이 일들 후에 하쉠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


표면상 ‘이 일들 후에’라는 표현은 파라샤의 한 부분을 이전 부분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분명 우리는 이것이 이쯔학크의 탄생을 둘러싼 모든 세부 사항을 언급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것이 아케다의 사건으로 이어졌다는 것으로요.


아브라함과 싸라는 늙고 수많은 해 동안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이를 가질 수 없었고, 그의 탄생은 신성한 지정에 의해 기적으로 태어났으며 이 모든 배경이 그 시험을 더 훌륭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당신의 마음을 더 깊이 열어보세요.

거룩한 라브 쿡은 ‘이 일들 후에’라는 표현이 ‘이 시점까지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요.

문자 그대로, 우리가 배운 모든 것, 베레쉬트의 시작부터 모든 창조물이 ‘이 모든 것들’로 이어졌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모든 것, 이 모든 세상, 우리가 겪는 모든 것, 그리고 람할이 가르친 대로 ‘모든 창조물’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우리가 관련시킬 수 없는 무언가를 포함한 아브라함과 같은 시험에 직면하게 될 모든 이들의 삶에 대한 준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에 대한 도전과 모든 창조물은 오로지 이 목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쉠께서 우리에게 보내는 (시험의) 순간은 우리 내면의 개척되지 않은 강점을 증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브 하임 리치만 Rabbi Chaim Richman

번역: 아담 리 (유대교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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