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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샤트 바옉히 5783 '희망의 세상'

샬롬, 이번 주 토라 부분은 47:28부터 시작되는 베레쉬트(창세기)의 마지막 부분인 파라샤트 바옉히입니다.

이 부분은 본질적으로 이집트에서 있었던 족장 야아코브(야곱)의 마지막 해에 초점을 맞춥니다.


사랑하는 요쎄프(요셉)와 마침내 재회하고 나서 그의 모든 아들들에게 둘러싸인 이 시기는 그에게 가장 행복한 해였습니다.

야아코브가 병들고서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움을 알게 되었을 때 그의 아들들을 임종의 자리에 불러 말하는데, 그는 구속의 시간인 마쉬악흐(메시아) 시대의 마지막 날들의 비밀을 의미하는 ‘끝’의 시간을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어했습니다.


49:1에서는 ‘야아코브가 그의 아들들을 불러 말하길 ‘모여라, 그리고 내가 마지막 날들에 너희에게 일어날 일을 너희에게 얘기할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그는 바로 그것을 말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갑자기 계시를 잃어버림으로써 그에 대한 정보를 누설하는 것이 금지되었었다고 유대 현인들은 가르칩니다.

슉히나, ‘신성한 임재’가 떠나감으로 인해 그 예언적 지식이 그로부터 철회되었고 숨겨졌고 그 대신 우리는 야아코브가 그의 아들들을 축복하는 것을 봅니다.


표면적으로 마지막 날들에 대한 이러한 축복은 아무것도 아닌 듯 보입니다.

지금부터 구속의 때까지 그들에게 닥칠 모든 일을 그의 아들들에게 계시하는 건 금지되었지만, 그가 그들에게 준 축복은 실제로 그들의 본질과 내적 본성에 대해 심오하며 개인적인 독특한 통찰력이 됩니다.


그것은 각 지파의 강점과 약점을 암시해 주었는데, 그의 축복은 그의 자녀들이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도전에 맞서도록 돕는 이정표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서 그는 예언적으로 각 아들의 후손인 다음 세대들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마쉬악흐의 도래와 함께 영적 혁명으로 모든 사람들 사이의 조화를 촉진할 궁극적인 구속은 토라의 근본적인 ‘믿음’입니다.

이것은 마이모니데스(람밤)가 기본 믿음의 초석으로 제시한 13가지 원칙 중 하나이며, 이스라엘의 기도서인 시두르에서 유대인들은 매일 아침 다음의 진술로 그 믿음을 확인합니다:

‘나는 마쉬악흐의 오심을 완전한 믿음으로 믿으며, 비록 그가 지체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일 그를 기다린다.’

그리고 매일 세 번씩 드리는 아미다 기도에서 우리는 ‘우리가 온종일 당신의 구속을 바랍니다’라는 말을 낭송합니다.


하쉠의 구속에 대한 갈망, 희망, 열망은 우리 삶의 중심입니다.

이제 여기서 마음을 열어보세요.

우리는 하쉠께서 그분의 때에 구속을 이루어 주실 것을 압니다.

그것을 이루어지지 않은 시간이라고 불러봅시다.


우리는 또한 온 이스라엘이 합당한 것으로 판명될 때 마쉬악흐가 오실 것이며, 그 구속이 때가 되기 전에 즉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속은 이루어 질 때까지, 즉 하쉠께서 정하신 마지막 때까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샤야후(이사야)예언자는 이 생각을 표현하는 구절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60:22에서 예언자는 ‘나는 하쉠이다. 그때에 그것을 곧 할 것이다’라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 구절은 그 자체로 모순되어 보입니다.

만약 그것이 ‘그때에’라면, 즉 구속이 신성하게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는 것이라면 하쉠께서 그것을 더 빨리 일어나게 하실 것이라는 ‘(내가) 그것을 곧 할 것이다’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에 대한 대답은, 두 시나리오 모두가 잠재적인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미리 정해진 이루어지지 않은 시간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합당한 것으로 판명되면 그것은 더 빨리 일어날 수 있으며, 하쉠께선 그분의 친절로 그 시간을 앞당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 모든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는 듯 보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이것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아코브는 단과 가드의 축복 사이에 그의 아들들에 대한 놀랍고도 시적인, 베일에 싸인 축복을 하는 도중 잠시 멈추었다가 일종의 ‘시간 초과’로 인해 축복을 멈추고 갑자기 짧고 개인적인 기도를 올립니다.


리요슈아텍하 키비티 하쉠, ‘당신의 구원을 제가 바랍니다, 하쉠이시여!’


이 단어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고 왜 바로 여기서 나타나는 것일까요?

‘내가 바란다’라는 키비티라는 단어는 무엇일까요?


우선 우리는 희망이 이 세상과 다가올 세상에서 모든 것의 열쇠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희망은 용서의 원천이 됩니다.


예샤야후는 33:2에서 ‘하쉠이시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시오, 우리가 당신을 바랐습니다!라고 말하며, 트힐림(시편) 130편에서의 다비드(다윗)왕의 기도 또한 희망으로 가득 찹니다.

‘내가 하쉠을 바라니 내 혼이 바라며 그의 말씀을 내가 바란다...이스라엘아 하쉠을 바라라. 이는 친절하심이 하쉠과 함께 함이니 그에게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로다.’


하지만 이 갑작스러운 개인 기도를 더욱 특별하게 하고 마음을 열게 만드는 것은, 자비와 친절을 의미하는 하쉠의 거룩한 네 글자 이름인 유드 케 바브 케가 베레쉬트 책의 마지막 3분의 1 전체에서 그동안 거의 사라졌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쎄프가 팔린 이후 베레쉬트의 모든 장에서 그분의 이름이 빠졌었습니다.

32장에서 야아코브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간 일과 38장에있는 예후다(유다)와 타마르(다말)의 이야기, 그리고 포티 페라(보디발)의 집에서 있었던 요쎄프의 사건 때와 39장에서 감옥에 있던 요쎄프의 때를 제외하고는 모두 그분의 이름이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기서 갑자기 그 이름이 나타나는데, 그 이름이 때로는 숨겨지고, 때로는 드러나는 이유는 매우 깊은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때로는 믿음의 위기를 겪습니다. 절망에 빠지기 쉽죠.

그러나 인간의 영은 하쉠의 일부이기에 신성한 영을 소유한 인간으로서 우리의 마음의 자연스러운 상태인 ‘기본값’은 하쉠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바탕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쉠의 이름이 요쎄프의 이야기 전체에 걸쳐 감춰져 있는 것처럼 여러 겹의 은폐와 클리포트(껍질)는 우리를 하쉠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그렇게 우리를 진정한 자아로부터 분리시켜냅니다.


우리는 날마다 시험과 시도를 받습니다.

이 삶에서 겪는 우리의 모든 것, 즉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수고와 시험의 목적은 모두 우리의 마음을 일깨우고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가 가라앉은 관성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하쉠께로 직접 향하게 합니다.


‘당신의 구원을 제가 바랍니다, 하쉠이시여!’라는 야아코브의 말은 우리의 본래의 영이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네! 저는 하쉠께서 저를 사랑하시고 친절로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사랑과 친절로써 세상을 구속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야아코브가 지금도 우리에게 계속해서 밝히고 있는 비밀입니다. 이 마지막 세대들, 약해지는 마지막 날들에 말입니다.


야아코브가 표면적으로 그의 자녀들에게 전달하고자 의도했던 예언을 잃어버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구원을 제가 바랍니다 하쉠이시여’라는 말로 족장은 미래의 구속을 예언합니다.

이제 가장 깊이 당신의 마음을 열어보세요.

그를 통하여, 이 기도를 통하여 하쉠의 이름이 ‘감춰진 것’으로부터 다시 한 번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드문 세 단어를 통해 야아코브는 그의 아들들에게 앞으로 그들에게 닥칠 모든 것들을 다음 통지가 있을 때까지 헤쳐 나가는데 필요한 유일한 처방을 써줍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깊이 마음을 열어보세요.


구속의 비밀은 희망이며 갈망입니다.

탈무드는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 심판을 받기 위해 하쉠의 하늘 법정에 올 때 몇 가지 질문을 받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 다른 사람들에게 정직하게 대해주었는가?

- 토라 공부를 위해 시간을 따로 내었는가?

- 자녀들을 세상에 불러내었는가?

- 그대는 하쉠의 구원을 갈망하며 기대했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영혼의 판단을 결정하는 요소가 되듯이, 이것들은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기준이 됩니다.

‘찌피타 리슈아?’, 당신은 구원을 바랐나요?

하쉠의 구속을 갈망했습니까?

삶의 이러한 갈망을 통해서 우리는 물질 세계를 영적 근원과 연결시키며 숨겨진 것과 드러난 것을 연결합니다.

우리가 하쉠의 이름을 밝히는 것이죠.


유대 현인들의 이 놀라운 가르침은 그날 우리 각자가 이러한 질문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속의 비밀 중 하나인 심오한 진리를 우리에게 전달해 줍니다.


‘희망’은 마치 누군가가 느끼거나 느끼지 않는 것과 같이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개발하도록 위임 받고 신임 받은 기본적인 영적 도구입니다.

심판 때 영혼에게 던져지는 질문은 ‘정말로 그 도구를 사용했느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기에 도착하기 전에 우리가 궁극적으로 어디로 가야 하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것을 이용해 답을 찾아야 하는데, 거룩한 람할이 쓴 것처럼 그것은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이 갈망의 속성에 도달한다면 비록 선행이 부족하다는 것이 밝혀지더라도 그는 다가올 세상에서 부끄럽지 않게 될 것입니다.

희망은 ‘모든 것’이고 그에게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야아코브는 하늘 법정에서 제기될 ‘하쉠의 구원을 간절히 바랐는가?’에 대한 질문이 실제로 ‘포기하지 않았는가?’를 의미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당신은 당신이 구원 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나요? 구제할 가치가 없다고 여겼나요?

‘구원 받을 가치가 없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그것을 바라고 하쉠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나타낸다면 당신은 이미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겁니다.


희망에 대한 야아코브의 권고는 우리에게 또한 깊이 오해 된 진리를 상기시켜 줍니다.

바로 ‘응답 되지 않는 기도’라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쉠께서는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뜻대로 응답 되었다고 생각하는지 여부에 상관없이 항상 듣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하쉠께서 우리가 요청하는 치유나 응답, 또는 구원을 보내지 않으신다고 해서 그분이 듣지 않으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비드 왕은 트힐림 27편의 마지막 구절에서 바로 이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하쉠을 바라라. 너의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게 하라. 하쉠을 바라라.’


왜 ‘하쉠을 바라라’는 말을 반복할까요?

유대 현인들은 이 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하쉠께서 당신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다고 느낀다면 스스로를 강하게 하라. 그리고 하쉠을 다시 바라라. 그러면 하쉠께서 당신에게 용기를 주실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기도를 멈추지 마라!’


기도가 응답 되지 않더라도 계속 기도하십시오.

또한 당신이 자격이 없다고 느끼더라도 계속 기도하십시오.

바로 그 희망이 당신을 합당하게 만듭니다.


예샤야후 예언자가 40:29-31에서 선언하는 것을 보시길 바랍니다:

‘(그는) 피곤한 자에게 힘을 주시고 능력이 없는 자에게 강하게 하시니, 젊은이들이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이 넘어지더라도 하쉠을 바라는 자는 새로 힘을 얻으며, 독수리들처럼 날개를 치며 올라가고, 달려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집트의 좁은 지역 한가운데서 하쉠의 이름이 그토록 많이 은폐 된 후 훨씬 더 은폐되게 될 이집트의 어두운 대량 학살 직전, 야아코브는 아들들이 그들이 마지막 날들에 대해 알아야 한다지만 뒤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요! 그는 우리에게 분명 비밀을 알려줍니다.


야아코브는 예언으로 아들 한 명 한 명에게 교정의 길을 열어주고 그 가운데 가장 위대한 예언을 합니다.

그리고 토라는 그것을 공개적으로 바로 기록했지요. 구원의 비결은 희망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의로운 족장 야아코브는 이 기도를 통해 세상 끝날 때까지 영원한 소망을 낳았고, 그의 말은 우리를 포로 상태에서 벗어나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구원으로 인도하게 할 희망의 영적 뿌리가 됩니다.


모든 존재의 창조주인 자비로운 하쉠께서 선언한 ‘보라, 그것이 아주 좋았다’라는 모든 것의 시작이 되는 발전과 하락의 책, 아버지와 아들과 형제의 책, 오해와 다툼의 책, 사랑과 화해의 책이자 창조의 책 베레쉬트는 이번 주에 끝나게 됩니다.

그것은 이집트로의 내려감으로 인해 지평선에 어둠이 드리워지고, 포로과 구속의 직전에서 하쉠에 대한 믿음과 신뢰로 끝을 맺습니다.


희망의 예언적 씨앗을 심음으로써 슈모트(출애굽기/탈출기)는 우리를 끔찍한 속박에서 자유로, 시나이 산의 언약과 계명들의 석판으로, 그리고 성막으로 인도합니다.


약속된 예언의 길과 희망으로 포장된 길을 따라 위대하고 최종적이면서 완전한 구원이 우리 시대에 속히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라브 하임 리치만 Rabbi Chaim Richman

번역: 아담 리 (유대교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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