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파라샤트 바이슐락흐 '작아지다' 5783

샬롬, 이번 주 토라 부분은 베레쉬트(창세기) 32:4에서 시작하는, 그가 보냈다를 의미하는 파라샤트 바이슐락흐입니다.


이번 파라샤는 계속해서 족장 야아코브(야곱)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천사와의 전투를 포함해 그의 삶에 중요한 많은 사건들, 하쉠께서 야아코브에게 이쓰라엘이라는 이름을 더하신 것, 에싸브(에서/에사우)와의 만남, 슉헴(세겜/세켐)에서의 야아코브의 딸 디나의 강간, 그리고 그 도시에 대한 쉼온(시몬)과 레비(레위)의 복수, 빈야민(베냐민)의 탄생과 락헬(라헬)의 죽음, 야아코브와 에싸브가 이쯔학크(이삭/이사악)를 매장한 일 등을 포함합니다.


야아코브가 라반의 집에서 일하는 오랜 세월 동안 그는 하쉠의 모든 계명들을 주의 깊게 지키면서 크나큰 자기 희생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세웁니다.

겉보기에는 그는 그저 고된 육체 노동으로 가족 부양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라반의 계략이 그를 실패케 하고자 끊임없는 시도로 그의 앞에 계속 장애물을 둡니다. 그런데 야아코브의 진짜 직업은 ‘세상을 고치는 일’이었습니다.


이번 주 토라 부분은 야아코브가 하란으로부터 돌아와서 에싸브와 만난 때부터 이쯔학크가 죽을 때까지의 23년에 걸쳐 있습니다.

야아코브가 아버지 이쯔학크로부터 축복을 받은 지 어언 20여년이 흘렀고, 이로 인해 에싸브가 분노했었으며, 그의 어머니 리브카가 야아코브에게 라반에게 피신하도록 지시했었습니다.

그러고서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야아코브는 에싸브의 그 의도가 불분명한 400명의 군을 이끌고 그를 만나러 다가오는 것에 대해 걱정합니다.


야아코브는 그 운명적인 만남을 준비하고자 선물, 구원을 위한 기도, 유사시 전투 준비 등의 3가지 전략을 세웁니다.

야아코브는 형 에싸브의 손으로부터 자기를 구해달라고 하쉠께 기도했습니다.


이제 여기서 당신의 마음을 열어보세요.

그는 32:10에서 ‘내 아버지 아브라함의 엘로킴, 내 아버지 이쯔학크의 엘로킴이시여, 제게 ‘너의 고향 땅으로 돌아가라, 내가 너에게 좋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하쉠이시여!’라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당신께서 당신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친절들과 모든 진리로부터 제가 작아졌습니다. 제가 막대기로만 이 야르덴(요단강)을 건넜었는데 지금은 두 진영이 되었습니다. 저를 제 형 에싸브의 손으로부터 제발 구해주소서.’


그런데 그의 기도에서 야아코브는 문자적으로 ‘내가 작아졌다’라는 다소 놀라운 단어인 ‘카톤티’를 사용합니다.

‘당신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친절들과 모든 진리로부터...’


토라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나오지 않는 ‘내가 작아졌다’라는 이 특이한 단어 선택은 야아코브에게 무슨 의미였을까요?

라쉬는 야아코브의 의도가 ‘당신이 나를 위해서 베푼 친절과 진리로 인해 내 메리트가 줄어들었다’라는 유대 현인들의 유명한 가르침을 인용합니다.

야아코브는 지금까지 받은 하쉠의 모든 크신 친절이 그의 메리트와 그의 신용을 제한다면 그것 자체가 최대치였을까봐 두려워했고, 그것 때문에 그는 에싸브와의 만남을 두려워했습니다.


‘내가 작아졌다’라는 의미는 하쉠께서 그에게 베푸신 모든 친절로 인해서 그가 오히려 부족함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야아코브가 한 말의 의미에 대해 잘 알려진 이해 중 하나입니다.

카톤티: ‘이 모든 친절을 경험하고 나니 내 자신이 작아진 듯하다’

그래서 야아코브가 느꼈던 그 작음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당신이 제게 베푸신 모든 친절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토라를 공부할 때 우리를 이끄는 원칙이 ‘토라는 영원하며, 모든 세부사항은 모든 시대와 우리 각자에게 깊고 오래도록 지속되어 심오한 교훈을 전달한다’인데, 야아코브의 삶에서 배운 교훈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이것이 사실임이 얼마나 더 확실하다는 것일까요!


바로 이 부분에서 야아코브는 하늘이 정해준 이쓰라엘이라는 이중 신분을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그는 자신을 어느정도 완전히 초월하게 되었습니다.

유대 현인들은 족장들 자신들이 이 세상에 있는 슉히나(하쉠의 임재)의 전차라고 가르칩니다.

그들이 인간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해 그들의 삶 자체가 이 세상에서 하쉠의 성품을 전하는 그릇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야아코브는 유대 현인들에 의해 ‘족장들의 완전성’으로 불립니다.

토라는 그의 삶과 모험, 그의 감정 표현에 대해 많은 세부 사항을 제공해서 그의 인간성을 우리가 더 쉽게 접하도록 해줍니다.

세 명의 족장 중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동일시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야아코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더 마음을 열어본다면, 야아코브의 그 애매한 ‘카톤티’라는 표현에서 더 깊은 의미와 변형의 교훈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야아코브는 노력해야 할 정신 상태를 드러내고 있으면서 하쉠과의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영적 기초와 하쉠의 축복을 받는 방법, 그리고 그에 대해 감사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야아코브는 먼저 하쉠께서 바로 지금까지 베풀어 주셨던 모든 친절에 깊은 감사를 표했고, 그가 20여년 전에 손에 막대기만 들고 빈털터리로 야르덴을 건널 때의 상황을 회상합니다.

그는 이제 그의 소유물과 가축을 포함해 두 개의 진영으로도 나눠낼 수 있을 만큼 번영하는 큰 가족의 우두머리로 서 있습니다.

그것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이었습니다.

내 자신의 의식이 어느정도 부풀었다면, 이제 나는 내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자인지 알게 됩니다.

그 분의 ‘헤쎄드’, 그분의 친절 그 자체가 사람이 그 분에게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하쉠께서 사람에게 베푸시는 큰 친절을 바라보는 이런 방식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해냈을/만들어냈을’ 때 반응하는 방식과 정반대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이 소유물과 그의 가족과 함께 번영하고 성취감을 느낄 때 자신의 자아감이 자신의 마음 속에서 커져갑니다.

그는 마치 중요한 사람처럼 깃털을 뻣뻣하게 세우고 뽐내며 다니지요.

그의 존재는 매우 눈에 띄는데, 너무 많은 셀카를 찍느라 팔이 경련을 일으킬 정도입니다.


그런데 야아코브는 하늘의 축복을 받으면서 계약을 맺습니다.

그의 자아감은 되려 쪼그라듭니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요?

하쉠께서 우리에게 친절을 베푸실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나요?


대부분의 자연스러운 반응은 ‘받은 것’에 집중합니다. 그 자체가 기쁨의 원천이기 때문이지요.

‘내가 이것을 받았다’, ‘나는 이런 걸 가지고 있다’, ‘그것은 날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내 것이다’, ‘나는 매우 큰 자다’...

과대망상적인 그 넓음을 느끼면서 그는 행복을 느낍니다.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위대한 일이고, 나는 그것보다 더 위대하다’...

이런 것들은 비록 자연스러운 반응이더라도 그것은 인간 본성의 내적 비열함을 반영해주고 확인 시켜주는 꼴입니다.

자아도취와 자기중심은 ‘나’를 중심에 두어 매 순간을 ‘내 것’으로 만듭니다.

그것은 누구의 순간이어야 할까요?


‘내가 이 축복을 받았으니 이것은 분명히 나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배은망덕한 자나 거짓말 하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하쉠을 알아보고 그 분께 어떠한 감사를 표현하는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신이시여, 당신께서 제게 이 축복을 주신 것을 제가 압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자 말입니다.


그런데 이 감사는 부정직함과 자기기만을 내포하고 있는데, 그가 스스로 커질수록, 그로부터 더 작아지고 멀어지는 것이 하쉠이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정말로 확실한 축복이 필요했는데, 그것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에 관한 모든 것으로, 그는 그 받은 것에 초점을 맞추면서 하쉠께 감사한다고 하지만, 그가 실제로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토록 훌륭한 조력자가 되어 주신 신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당신과 연결될 수 있어서 매우 기쁩니다.’

‘당신께선 무한하니 계속해서 제게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겠지요?’...

내면의 깊은 곳에서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하쉠을 바라봅니다.


이제 여기서 가장 깊이 한 번 마음을 열어보세요.

하쉠께선 주시는 분이긴 하지만, 사람에게 그분은 단지 수단일 뿐입니다.

그래서 각 개인은 매우 감사한다 하더라도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얻었다’는 것 뿐입니다.

하쉠께서 ‘배달원’인 것입니다. 만약 다른 존재가 그렇게 했더라도 그는 그것 또한 좋을 겁니다.

그는 특별히 하쉠의 손으로부터 얻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반대가 오히려 사실로, 우리는 우리가 받는 모든 것이 오직 하쉠의 손으로부터 온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서 마음을 더 깊이 열어 보세요.

거룩한 바알 쉠 토브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어느 이른 금요일 아침에 그의 집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안식일을 위한 음식도 없었으며 돈도 없었습니다.

그는 숲 속을 걷다가 어느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한 번 두드리고 그런 후 가던 길을 계속 갑니다.

그 집의 거주자는 노크 소리에 잠을 깨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재빨리 옷을 입고 문을 열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멀리서 걸어가는 사람을 보았고, 그에게 당도할 때까지 쫓아가서 “당신이 내 집 문을 두드린 사람이오?”라고 물었습니다.

바알 쉠 토브는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고, 그 사람은 “왜 내 문을 두드린거요?”라고 물었습니다.

바알 쉠 토브는 “도움이 필요해서 그랬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사람이 물었습니다. “그럼...왜 내가 문으로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은거요? 왜 노크만 하고 나간거요?”

바알 쉠 토브는 대답했습니다. “문을 열어줘서 고맙습니다 내 형제여, 저는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당신으로부터 온 것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바알 쉠 토브는 하쉠에게만 전적으로 의존했고, 사람이 그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조차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쉠의 축복을 받을 그릇을 만들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만 하면 됨을 알았기에 처음 찾은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가 얘기한 ‘꼭 당신이 아니어도 됩니다’라는 말은 ‘(당신께서) 저를 도와줄 하쉠의 배달원이라면 감사히 받겠지만, 솔직히 이건 당신과 아무 관련이 없고 하쉠께서 제게 제공하기로 하셨기에 괜찮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하쉠께선 모두에게 제공하시는데, 그것은 ‘전달자’를 통해서 오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단지 전달자일 뿐입니다.

우리가 받는 모든 것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오직 하쉠으로부터만 옵니다.


야아코브는 이 깨달음으로 우리가 친절을 받는 방식에 대해 ‘어떤 영향을 미치고 우리를 하쉠께 더 가까이 데려가는지’를 가르칩니다.

‘저는 작아졌고, 당신의 친절을 받았으며, 그것들이 나를 작게 만들었고, 그것들이 나에게서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나를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도록 가르쳐줬고, 그를 통해 이것이 정말로 전부라는 깨달음, 즉 나의 작음에 대한 나의 이해야 말로 진정한 선물이자 축복입니다.’

(하쉠의) 친절하심은 당신이 누구인지,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당신이 나에게 누구인지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야아코브의 ‘내가 작아졌다’는 진심어린 반응은 기본적이면서도 본능적인 ‘나는 나의 것’이라는 반응과는 정반대입니다.

그가 매 순간 하쉠의 손에서 산다는 것을 더 잘 알게 될수록, 그는 자신이 받는 모든 친절을 더욱 더 잘 알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익숙하고 당연하게 여기는 모든 작은 것들을 포함해서, 그의 모든 삶이 하쉠의 친절이라는 것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오히려 ‘작아집니다’.


디브레이 하야밈 알레프(역대상) 29장에서 우리는 모든 백성이 어떻게 금과 은과 보석과 그 외 재료들로 거룩한 첫 번째 성전을 건축했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9절을 보면 ‘백성이 그들의 자원제물을 바침으로 기뻐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완전한 마음으로 하쉠께 자원제물을 바쳤기 때문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비드(다윗) 왕도 그에 대해 크게 기뻐했고, 타낙흐 전체에서 가장 심오하며 아름다운 계시적 구절 중 하나로 14절에 ‘제가 누구이고 제 백성이 누구라고 우리가 이렇게 자원제물을 바칠 수 있겠나이까’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하쉠으로부터 나왔고 하쉠의 손으로부터 우리가 하쉠에게 드립니다.

우리가 줄 수 있는 자격이 뭐가 있다는 것일까요?

우리는 그저 하쉠의 것을 하쉠에게 돌린 것일 뿐입니다.

어떤 것도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쉠께 바친 것에 대해 칭찬을 받아야 할까요? 모든 것은 하쉠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위한 족장 야아코브의 교훈이고, 받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가장 깊은 비밀인 것입니다.


하쉠의 친절을 진심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항염 작용입니다. 자아를 부풀리지 않고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무의미하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의 겸손의 영을 불러 일으키는 진정한 영적 수준의 변화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쉠의 축복은 역으로 사람에게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을 무시하게 만들어 어떤 형태로든 물질적 부에 대한 자부심을 심연으로 가라앉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축복(축복은 물질적 표현이 아닙니다)은 진정한 축복이 하쉠임을 인정하며, 하쉠께서 우리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하시는지 정직하고 겸손하게 인식하게 함으로써 개인이 하쉠의 친절의 속성에 대한 변형적 계시를 경험케 할 수 있고, 우리를 이전보다 더 하쉠과 가까워지게 합니다.


카톤티, ‘내가 작아졌다’는 우리가 그분과 가까워 질수록 우리가 작아짐을 나타냅니다.


라브 하임 리치만 Rabbi Chaim Richman

번역: 아담 리 (유대교 TV)

Related Posts

See All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