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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s pictureAdam Lee

파라샤트 바이가쉬 5783 '슈퍼 히어로'

샬롬, 이번 주 토라 부분은 베레쉬트(창세기) 44:18에서 시작되는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라는 뜻을 가진 파라샤트 바이가쉬입니다.

이 부분은 요쎄프(요셉)가 그의 형제들과 아버지와 재회하는 것을 연대순으로 기록하는데, 다음 주에 있을 베레쉬트의 마지막 파라샤인 바옉히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을 ‘족장들의 시대’를 끝내는 것으로 이어질 화해의 장을 엽니다.


야아코브(야곱)와 그의 가족이 이집트로 내려감으로써 이제 역사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무대가 마련되고 있습니다. 이집트로의 유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요쎄프와 그의 형제들 사이의 강렬한 드라마는 절정을 향해 나아가면서 그 긴장이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됩니다.

대체 그보다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는 것일까요?


빈야민(베냐민)은 지도자의 은잔을 자루에 넣은 죄목으로 잡혔고, 예후다(유다)가 지난 주 미케쯔 부분의 끝에서 ‘우리가 제 주인님께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뭐라고 말씀드려서 무엇으로 우리를 정당화할 수 있겠습니까? 엘로킴께서 당신 종들의 죄악을 발견했으니 우리와 그의 손에 잔이 발견된 자 또한 제 주인님의 종들입니다.’라고 말했음에도 요쎄프는 ‘아니다, 그의 손에 잔이 발견된 자(빈야민)만 데려가겠다’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형들은 야아코브에게 돌아가서 그가 가졌던 최악의 두려움이 현실이 된 것을 그에게 말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절망합니다.


그가 사랑하는 아들 빈야민은 돌아오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가 노예로 잡힌 것입니다.

요쎄프도 없고, 쉼온도 없고 이제 빈야민까지?...예후다가 30절에서 표현한 대로 야아코브는 이제 반드시 죽게 될 것이었습니다.

‘지금 제가 당신의 종인 제 아버지에게로 갈 때 그 젊은이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면 그의 혼이 그 혼과 묶여 있기 때문에 그는 그 젊은이가 없는 것을 볼 때 죽게 될 것입니다.’


상황은 몹시 절망적인 듯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가족은 이미 재앙에 익숙합니다.

요쎄프와 그의 형제들 이야기가 시작된 이래, 37장인 파라샤트 바예셰브에서 우리는 위기에 처한 가족들을 보아왔습니다.

가장 좋은 가정도 어느 정도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 누구나가 알고 있습니다.

이 파라샤들에 걸쳐 그 실수들이 저질러졌는데, 요쎄프와 그의 형제들, 심지어 야아코브 자신도 오해를 심화시키고 더 많은 소외, 그리고 분노를 불러 일으키는 실수들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번 파라샤의 가장 위대한 교훈 중 하나는 우리 모두에게 항상 깨어진 관계가 치유될 수 있다는 점을 가르치는 것인데, 실제로 파라샤트 바이가쉬는 그 이야기의 전환점으로, 이제부터 교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 깨친 관계를 고치기 위한 수리 과정은,

자, 마음을 열어보세요.

그것을 시작하고 촉진시키려면 특별한 종류의 힘을 필요로 합니다.


요쎄프는 잠깐이라도 복수를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핑계, 모든 계략, 치밀하게 계획된 설정, 형들과의 정교한 심리전들은 완벽한 교정을 위해 레아의 자녀들과 락헬(라헬)의 자녀들 간 오래된 적대감을 바로잡는 기회를 만드는 것 뿐이었습니다.


이 대대적인 교정은 요쎄프의 계획으로, 화해의 교정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양쪽 모두의 참여를 필요로 했습니다.

그래서 교정을 위해서 먼저 죄를 인정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다시 파라샤트 미케쯔로 돌아가보면, 형제들이 서로 말하는 42장에 이미 교정의 잠재력이 빛나기 시작했었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우리 동생에게 잘못했구나! 그가 우리에게 애원할 때 우리는 그의 혼이 고통스러움을 보면서도 우리가 듣지 않았다. 이 고통은 그렇기에 우리에게 찾아왔다.’


그런데 이제 강력한 진리의 순간에서, 형제들의 리더인 예후다가 락헬의 아들 요쎄프를 미워하고 팔았던 레아의 아들들의 질투를 대표해 락헬의 아들 빈야민 대신 자신을 노예로 바치며 얘기합니다:

“제가 당신의 종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 젊은이는 형제들과 함께 올라가게 해주십시오.”


이것은 이 교정 개념에 있어 정말 완벽한 것이었고, 요쎄프가 기다려오던 증거의 순간이었습니다. 레아의 아들들이 락헬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이타적인 헌신으로 모든 위협을 무릅쓰면서 기꺼이 그것을 감수하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단순한 테스트가 아니라 수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후다의 그 준비는 우리들이 파라샤트 바예셰브에서 형들이 서로에게 ‘이제 그를 죽이자’라고 말했던 그 끔찍한 말을 읽었을 때의 표현을 고치는 완벽한 방법이 되었습니다.

예후다는 이제 여기서 빈야민을 해방시키기 위한 노예가 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교정은 ‘각기 행한대로’라고 이해할 수 있는 미다 케네게드 미다의 전형적인 예가 됩니다.


그렇지만 균열을 치유하기 위해선 양쪽이 모두 참여해야 하죠.

요쎄프 또한 이렇게까지 상황이 악화된 데에 어느정도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가 자기가 그들을 다스릴 것이고 그에게 절할 것이라는 꿈을 형들에게 말한 것과, 그의 형들이 주장하는 행동에 대해 아버지에게 부정적인 보고를 일러바쳤던 것, 이것들이 요쎄프가 고쳐야 했던 것들이었습니다.


이제 여기서 마음을 더 깊이 열어보세요.

이 모든 것은 비극으로 완전히 다르게 끝날 수도 있던 것이었습니다.


요쎄프가 복수하려고 했다면 가족은 모두 파멸되었을 것입니다.

요쎄프가 그들을 조금이라도 다시 보고싶지 않다고 생각 했었다면, 그들은 굶주림으로 멸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신 그의 형제들과 모든 가족, 그리고 그의 아버지를 사심 없이 챙긴 사람이 요쎄프였습니다.


그의 형들의 잔인한 행동으로 요쎄프는 끔찍한 고통을 겪었고, 모든 기준의 치료도 그에게는 극복할 수 없는 트라우마일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나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요쎄프가 그 회의를 어떻게 처리할 것이라 기대했나요?

우리는 이 회의가 어떤 모습일 거라고 기대했나요?


요쎄프가 어떤 일을 겪었는 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요쎄프가 자신을 드러낼 때, 다시 말하자면 ‘그의 가면을 벗을 때’, 그의 얼굴이 이제 분노의 가면이 될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격노?

정당하죠.


‘내 꿈이 무서워서 나를 죽이려 들었느냐?’

‘그래서 나를 공격해 전갈이 득실대는 구덩이에 집어넣은 것이냐?’

‘신발 때문에 동생을 팔아?’

‘내 옷에 피를 묻혀 불쌍한 우리 아버지를 속여?’

‘당신들이 내 인생에 한 짓을 봐!’

‘너희들은 자신들의 증오로 내 인생을 파괴했어. 내 얼굴 똑바로 봐!’

‘17살부터 서른 살이 된 지금까지 아버지와 그리고 내 집으로부터 빼앗아 버린 내 세월을 누가 돌려줄까!’


이것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회의로부터 예상할 수 있는 것일 겁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서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하겠죠.

그러나 대부분은 마치 몬테 크리스토 백작처럼 그 날을 위한 계획과 복수에 대한 생각으로 세월을 살아왔을 겁니다.


가장 깊이 마음을 열어보세요.

우리는 또한 그렇게 예상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심지어 형들 자신들이 기대(각오)했던 바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토라는 요쎄프가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에 그들이 너무도 충격을 받아 말을 할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적어도 가혹한 책망이라도 각오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복수를 받을 것을 각오했죠.

그러나 요쎄프는 꾸짖는 말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가혹한 단어는 하나도 없이 일어난 일은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그는 그들을 진정시켜주었습니다.

학대를 받았었지만 그는 그들을 달래주고 울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자기를 여기로 보낸 것이 당신들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들이 무죄임을 확신케 해주었습니다.


그의 용서는 최종적이었습니다.

그는 단지 그들을 용서한 것만이 아니었고 그들을 먹이고 공급했습니다.

그리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말 놀랍도록 믿을 수 없게도, 요쎄프가 그의 아버지와 재회하고 야아코브의 남은 17년간 그는 아버지에게 실제로 일어났던 일과 형들이 그를 어떻게 대했는지, 그리고 그가 이집트에서 어떤 상처를 입고 살아왔는 지에 대해서도 단 한 마디도 말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그의 용서는 너무도 극단적이어서 형들은 그가 그들을 용서했다는 것을 정말로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그가 아버지에 대한 존중으로 복수를 자제하는 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다음 주에 바옉히의 50장 부분에서 읽어볼 거지만, 야아코브가 죽자마자 형들은 요쎄프에게 아버지 야아코브가 그들을 용서해주어야 한다고 명령했음을 그에게 상기시킵니다.


그런데 사실 야아코브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고, 형들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조차 당연히 몰랐습니다.

그러나 형들은 결국 요쎄프의 복수의 칼날이 들이닥치게 될 것이라고 너무도 확신해서, 요쎄프에 대한 절망과 공포로 인한 두려움 속에 야아코브의 유언에 대한 이야기를 날조했습니다.

그들은 요쎄프가 권위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무엇이든 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계략도 필요하지 않을 거라며 말이지요.

그들이 고려조차 되지 않을 거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제가 서두에 말했듯, 그러한 교정을 시작하고 촉진시키려면 특별한 종류의 힘이 필요했습니다.


여기서 마음을 더 깊이 열어보세요.

형들이 충격을 받고 그들이 깨닫기 시작했던 것은 우리가 깨닫기 시작하는 것들입니다.


의인 요쎄프의 진정한 본질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가 그의 가장 유명한 시험으로 ‘의로운 요쎄프’라고 불리는 한 가지 이유를 목격했습니다.


날마다, 그리고 몇 년 간 그는 자기 주인의 아내가 그를 유혹하려는 끊임없는 시도를 견뎌냈고, 결국 그는 자기 옷을 그녀의 손에 맡기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으며, 그것은 그의 성격과 순결함뿐만 아니라 그의 놀라운 내면의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청춘의 한창 때에 있어서 그처럼 흠잡을 데 없는 자제력을 보여준 젊은이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나요?


우리는 이제 여기서 요쎄프의 위대함에 대한 또 다른 수준을 보게 됩니다.

파르오의 말을 인용해서 죄송합니다만, ‘이와 같이 하쉠의 영이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있겠나요?


이 사람의 수준을 이해하는 건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가 고통을 당하고 그의 형들이 그를 죽이고 싶어하며 그를 노예로 판 모든 일을 겪은 후에 그는 인내했습니다.

그의 미덕은 실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검증되었습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단 한 마디도 기억시키지 않은 겁니다. 그는 수동적 공격의 흔적조차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울고 위로하고 또 위로하면서 모든 것이 하쉠의 계획이었다고만 말합니다.


거룩한 람할은 그의 고전인 메씰라트 예샤림에서 복수에 대한 열망이 단지 그 뿐이었다고 가르칩니다.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느끼게 한 사람에게 복수는 삶의 이유가 되는데, 그런 개인이 복수의 유혹을 견디는 건 놀라운 수준의 자제력입니다.

이런 욕망에서 벗어나서 복수할 기회를 포기하고 집착하지 않는 결판의 순간을 기대하는 것은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참으로 강한 것입니다.

그것은 거의 초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토라는 우리에게 ‘감정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의 감정을 통제하는 것이 우리의 힘 안에 있는 것이라면서 말입니다.


토라는 방종(제멋대로 행동하며 거리낌이 없는 것)을 경멸합니다.

그래서 바이크라(레위기) 19장은 ‘너는 네 백성의 자손에게 복수하지 말고 원한을 간직하지 말며...’라고 명합니다.


기본적으로 토라가 우리가 느끼지 못할 것을 명령하는 또 다른 예는 유대 현인들의 복수원한을 품는 것의 차이점이란 것에 대한 설명입니다.

복수는 누군가에게 되갚는 것을 의미하나 꼭 원한을 품는 것은 포함되어 있지 있습니다.

반면 원한을 품는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그래 그렇게 해 줄게. 내가 요구했을 때 너는 나한테 해주지 않았지만 말이야. 나는 너와 달라.”와 같은 것을 얘기합니다.

거기서 가르치는 교훈으로, 토라는 우리에게 상처를 담아두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람할은 메씰라트 예샤림에서 그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으로, 사람은 극복하기가 어려우나 천사에게는 쉬울 것이다.’

그러나 토라는 우리에게 다음의 의미를 명령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복수의 욕망을 포기할 수 있는 속성은 우리가 달성해낼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다.’


자, 이제 여기서 어느 때보다 더 깊이 마음을 열어보세요.

요쎄프는 천사였나요, 아니면 인간이었나요?


토라의 교훈은 진짜로 평범한 인간이 천사보다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인간이 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어쩌면 영웅이 된다는 것일 겁니다.


여러분 모두가 알다시피, 영웅담은 항상 세계 문화와 문학의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오늘날의 대중 문화에서 슈퍼 히어로에 대한 매혹은 그 어느 때보다 큽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그토록 매력적으로 여기는 슈퍼 히어로의 특징이 무엇인가요?


그 중 하나는 실제가 아닌 것/존재라는 점으로,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영감을 얻는 ‘우리보다 더 큰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아닌 누군가가, 또는 우리가 할 수 없다는 일을 할 수 있는 누군가를 나타냅니다. 그들이 ‘인간 이상’이라는 것으로요.

그것들은 인간계에서 하쉠께서 제기하는 도전들의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한 사회학자는 이렇게 썼는데,

‘슈퍼 히어로는 우리에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주며, 그들의 행동을 본다는 것의 아름다움은 시청자가 실제로 슈퍼 히어로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지 않게 한다. 왜냐하면 그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슈퍼 히어로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묘사합니다. 제가 제 자신을 믿을 수 없고 결코 슈퍼 히어로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영웅이 하는 방식으로 결코 악에 맞서며 최선을 다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진실은, 사실 가장 큰 악은 우리 각자의 내면에 있다는 것으로,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직면하고 극복하도록 부름 받은 악들입니다.

유대 현인들은 반짝이는 지혜의 회전인 ‘선조들의 어록’, 피르케이 아보트를 보며 다음과 같이 그것을 간결하게 요약합니다.

‘누가 강한 자인가? 기록된 바와 같이 자기의 성향을 이기는 자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 욕심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정복한 자보다도 낫다.’


모두가 초인적인 힘을 가졌다는 슈퍼 히어로를 찾지만, 여기 자기 자신을 엎드려 이겨낸 요쎄프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실제의 슈퍼 히어로는 망토와 몸에 붙는 옷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의 능력 또한 초자연적이지 않습니다.

그는 다만 자신을 정복함으로 세상의 부정과 악을 정복합니다.

그는 자신의 인성을 완성하고 신성한 이미지에 걸맞게 만들고자 노력합니다.


요쎄프는 그렇게 하쉠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과의 관계, 심지어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과의 관계까지도 완벽하게 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초인이 되기 위해 자신의 인간적인 힘을 완성한 진정한 영웅, 의로운 요쎄프로써 우리에게 일관되게 알려진 것입니다.


라브 하임 리치만 Rabbi Chaim Richman

번역: 아담 리 (유대교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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