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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샤트 짜브 5783 '생각의 힘'

샬롬,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영적 성취를 방해하는 부정적인 생각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이것이 바로 바이크라(레위기) 6장에서 시작하는 이번 주 토라 부분인 파라샤트 짜브의 깊은 비밀 중 하나로, 이번 파라샤는 대제사장 아하론(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올라(올림제물/번제)의 법을 가르치라는 하쉠의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아하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명령하라. 이르기를, 이것이 올림제물의 법이다. 올림제물은 제단의 화로 위에 모든 밤 동안부터 아침까지 있어야 하고 제단의 불은 거기에서 타고 있어야 한다.’


이 파라샤는 민하(곡식제물)를 드리는 방법과 하타트(속죄제물), 아샴(배상제물), 쉘라밈(화평희생제물)에 대한 거룩한 명령으로 계속되는데, 파라샤는 누가 그것을 먹을 것인지에 대한 것과 코헨(제사장)들의 위임식과 함께 계속됩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파라샤트 바이크라로 바이크라의 첫 부분을 시작해서 성전의 제물이 다뤄지는 신성하게 고안된 고귀한 아이디어와 개념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모두 인간의 도덕적, 윤리적, 영적 발전과 개선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전과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양한 수준의 의미로 존재하는 광대한 지식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성전이 재건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쉠께서 하신 약속이며, 그 약속은 이스라엘의 모든 예언자들에 의해 계속해서 언급되고 확증되었죠.

유대인들은 매일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성전 재건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해 행동합니다.

그런데 그때까지 성전에서 섬기는 이 파라샤가 지금의 우리의 삶에 어떻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걸까요?


토라는 ‘역사책’이 아니라 살아있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바로 지금 우리 각자에게 의미가 있어야만 하는데, 그 모든 계명들의 깊이는 시나이 산에서 계명이 주어진 날만큼이나 오늘날 우리 각자에게도 관련이 있습니다.


먼저 성전 체험에 대한 핵심으로 거룩한 성전에 있는 제단의 중요성을 상기해 봅시다.

‘제물’은 사람을 동물과 같지 않고 인간답게 되는 것과 더 조화를 이루게 함으로써 사람이 하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돕고자 고안된 토라의 프로그램 중 주요 요소입니다.

모든 거룩한 섬김은 제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지죠.


예루샬라임의 모리야 산에 있는 그 위치는 성전보다도 이전으로, 세상이 창조된 바로 그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것의 정확한 위치는 첫머리부터, 심지어 창조 이전에 거룩하게 확립되었고, 첫 사람인 아담이 창조된 바로 그 지점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후에 아브라함이 이쯔학크(이삭/이사악)를 그가 쌓은 제단에 결박한 같은 장소이기도 했죠.

그 행동을 통해, 아브라함은 그곳이 인간성의 도전에 맞서는 장소가 될 것임을 확립 시켰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항상 하쉠과 우리의 관계를 찾고 심화 시키는 곳, 후에 거룩한 성전의 제단은 바로 그 자리에 세워집니다.


여기서 마음을 열어보세요.

지난번 파라샤인 바이크라 1:11에서 우리는 올림제물을 ‘제단 북쪽 하쉠 앞에서’ 잡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는데, 이번 파라샤트 짜브 6:18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속죄제물의 법이다. 올림제물이 도살되는 곳에서 속죄제물이 하쉠 앞에서 도살되어야 한다. 그것은 지성물이다.’

따라서 토라는 제단의 북쪽에서 속죄제물을 잡아야 함을 명령하고, 그 구절들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제물이 연결되어 있음을 분명히 해줍니다. 속죄제물의 도살 장소는 올림제물의 도살 장소와 동일한 것입니다. 이 지침에는 어떤 새어나감도 없습니다.


토라의 명령의 모든 세부 사항은 거룩한 의식으로부터 나옵니다. 따라서 각 세부 사항에는 엄청난 의미가 있죠.

속죄제물은 ‘행동의 세계’에 해당됩니다. 개인의 잘못으로 인한 피해를 처리합니다.

그리고 올림제물은 부적절한 생각에 대한 속죄를 가져오죠.


마음을 가장 깊이 열어 보세요.

토라는 이러한 제물들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에 대한 본질을 암시하고 있는데, 바로 교정입니다.


하쉠의 명령이 제단의 북쪽을 지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히브리어로 ‘북쪽’을 의미하는 단어 짜폰은 ‘숨김’을 의미하는 ‘짜푼’과 같은 글자입니다.

제단의 북쪽이 곧 ‘감춰진 생각’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생각이란 것은 볼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없죠. 그러나 사람의 ‘행위’는 모두에게 드러납니다.

심지어 사적으로 행한 것들도 결국 밝혀지는데, 왜냐하면 절대로 노출되지 않는 생각이란 것과는 반대로 사람의 행동은 밖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세상에 쏟아지고 어떤 일이 이루어지면 그것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에너지는 즉시는 아닐지라도 결국에는 보이게 됩니다.


이것은 너무 깊은 문제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마음을 더 깊게 열어보세요.

토라의 사고 방식에서 ‘생각’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들은 힘을 가지고 있죠.


생각은 실제이며, 사물입니다. 그것들은 물질과 존재를 가지고 있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모두가 아직 여기에 있고, 긍정적인 생각은 세상을 영원히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생각은 파괴를 할 수 있죠.


자 보세요, 기도에는 ‘합당한 생각’이 필요합니다.

토라의 ‘성전 제물에 관한 법’은 잘못된 생각이 제물을 무효화 시킬 수 있다고 규정합니다.

토라는 ‘생각’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는 거룩한 계명을 특징으로 합니다.

‘하쉠에 대한 사랑과 두려움’, ‘매일 이집트로부터 탈출했던 것을 기억’, ‘아말렉과 기타 기억에 기반하는 명령들’을 기억해야 하고, 탐심, 마음의 증오, 원한 등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생각의 계명’에 대한 몇 가지 예일 뿐입니다.


그러면 죄는 사람 안에서 어떻게 잠재적 영역으로부터 진화해 행동의 영역에서 실현될까요?

유대 현인들은 ‘피르케이 아보트’에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가르칩니다:

‘눈이 보고, 마음이 원하며, 행동의 도구가 그것을 완성한다.’


눈이 보고 마음 속의 생각을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행동의 영역까지는 매우 짧은 거리인데, 모든 행동은 그렇게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생각은 근원이고 행동은 필연적인 파생물입니다.

따라서 탈무드 요마의 깊은 가르침에서 유대 현인들은 어떤 의미로 ‘죄를 짓는 초기 동기’인 생각이 ‘행동 자체’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바로잡기가 더 어렵다고 가르칩니다.


죄가 나쁠수록 행위의 세계에서는 ‘명백한 행위’로 나오는 것으로 인해 일반적으로 바로잡을 수 있으며, 긍정적인 행동은 부정적인 행동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에는 상응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물질 세계에서 실현되지 않은 채 더 고차원적인 영역에 정지된 상태로 남아있고, 그것이 만들어낸 손상은 이 세상에서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복구하기 훨씬 어렵습니다.

때문에 그 거룩한 구절은 속죄제물과 올림제물을 드리는 곳이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곳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속죄제물을 올리도록 이끈 죄된 행동은 올림제물을 올리도록 이끈 근원인 ‘마음의 생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바로잡기 위해선 우리의 근원, 즉 우리의 생각의 세계로부터 출발해 우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끄는, 드바림(신명기) 29:17에서 ‘독초의 뿌리나 쓴 쑥의 뿌리’라고 한 것과 같은 모든 부정적인 생각을 배출시키는 것을 정화시켜야 합니다.

우리의 부정적인 생각은 우리의 마음을 위축시키고 우리의 의식을 어둠 속으로 빠뜨립니다.

우리의 생각을 되찾고 통제하라는 도전과 요구는 이번 파라샤를 여는 구절의 비밀 중 하나입니다: ‘제단의 불은 거기에서 타고 있어야 한다.’


거룩한 성전의 제단에 제물을 드릴 때처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그 의식이 분명해야 하고 구체적인 의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물은 무효가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의식 또한 하쉠의 제단에 비유되는데, 우리는 거기에 무엇을 바치고 싶은 건가요?


불은 우리의 순수한 의도입니다. 모든 부정적인 생각을 불태우기 위해 계속 불을 태워야 합니다.

그 불은 결코 꺼지지 말아야 하고, 그 불 위에서 우리는 모든 악하고 부정적인 생각과, 우리를 의심으로 채워내는 우울하고 절망적인 생각을 태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중 어느것도 ‘진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쉠만이 실재이고, 우리는 우리 내면의 불의 근원 되시는 그분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 구절을 반복함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내는 명상으로 그 과업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거룩한 전통이 있는데,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부정적인 생각조차도 하쉠의 섭리 중 일부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직면하는 도전의 모든 다른 측면들도 마찬가지죠.

레베 낙흐만은 사람의 마음은 한 번에 한 가지 생각만 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렇기에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밀어내고, 부정적 생각을 역으로 “아니! 나는 너(부정적인 생각)가 여기에 있는 것을 원치 않아!”라는 부정적 생각으로 말해내면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전은 모든 창조물의 축소판이자 반영입니다. 창조물이 그의 목적의 영적 토대를 반영하듯, 거룩한 성전의 실재도 우리를 위해 빛을 발합니다.

우리가 창조된 인간의 잠재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개발해야 하는 생명력인 ‘네페쉬’의 모든 장소를 비추는 것입니다.


그럼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통제할 수 있는 걸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바알 쉠 토브는 사람이 그의 생각이 있는 곳에서 발견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그의 생각이며, 그것들은 ‘두 개의 분리된 실체’가 아닙니다.

토라는 인간이 자신의 행위뿐만 아니라 자신의 말과 생각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음을 가르칩니다.

이것은 중요한 심리적 원리를 전달하는 것으로, 어떤 사람이 부정적인 것에 노출되면 그것은 결국 그에게 영향을 미치는데, 우리는 그렇게 타인에 대한 끔찍한 잔혹 행위, 착취 등에 대한 언론 보도의 홍수로 폭격을 받고 있죠.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사람들이 ‘오락’이라고 부르는 의제 중심의 악마에 의해 찬사를 받으며, ‘매력적이고 바람직한 것’이라고 주장되고, 어린아이들로부터 시작해 온 인류의 마음을 조직적으로 파괴합니다.

사회는 그렇게 건강한 가족 가치의 총체적 평가 절하와 부정을 향해서 비틀거립니다.

또한 ‘개방과 수용’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디스토피아적 신세계의 창조를 목격하죠.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목격하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자문하고, 그러면서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 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다는 미명 하에 모든 것을 합법화합니다.


토라는 생명이 그 의도된 대로 번창할 수 있는 기본 원칙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읽고, 생각하는 대로 마음의 욕망에 따라 행동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에 희생양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납치되어서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말이죠.


우리는 자신의 의식에 따라 잠들었다가 너무 늦게 깨어나 ‘잔인무도한 적’의 인질이 된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생각을 만드는 법을 배운다면, 우리는 내면의 변화를 일으켜 하쉠을 붙드는 데 성공할 수 있습니다.


감정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생각입니다.

부정적이거나 거짓되고 자멸적인 생각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그것들을 제단에서 태워냄으로 그 생각들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그 노력과 성실의 행위는 하쉠을 기쁘게 하는 향기를 불러 일으킬 것이며, 우리 자신의 참된 거룩한 이미지의 영원한 아름다움을 반영하도록 우리의 행동을 조절함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라브 하임 리치만 Rabbi Chaim Richman

번역: 아담 리 (유대교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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