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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샤트 톨도트 5783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샬롬, 이번 주 토라 부분인 파라샤트 톨도트는 리브카(리브가)와 이쯔학크(이삭/이사악)의 자녀들인 쌍둥이 형제 야아코브(야곱)와 에싸브(에서/에사우)의 투쟁을 소개합니다.

우여곡절이 많은 내용이지만 여기서 우리는 이야기의 아주 특정한 부분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야아코브와 에싸브가 ‘일란성 쌍둥이’가 아니라고 말하는 건 사실 엄청나게 절제된 표현입니다.

그들은 모든 면에서 정반대였는데, 세상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점은 그들이 그들 자신도 아니었다는 것이며, 아니면 오히려 그들은 그들 자신이었으나 심지어 그 이상이었는데, 그들이 자기 자신들을 각자 초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토라 공부에서 우리는 성경이 모셰가 모든 세대의 학식 있는 현자들을 통해 전한 규칙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원칙으로 인도되지만, 그렇게 하면 구절은 그 단순한 의미는 결코 벗겨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야아코브와 에싸브에 대해 배우는 모든 것은 그 규칙에 대한 놀라울 정도의 예외를 봅니다.

토라 자신은 여기에서 야아코브와 에싸브의 이야기가 문자 그대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아이들의 엄마인 리브카는 자신이 비정상적인 임신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에 불안해 했습니다.

25:22은 우리에게 ‘아들들이 그녀 속에서 서로 밀쳤다 알려줍니다.

그녀는 그것이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걸 이해했고, 그것은 보통의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하쉠께 물었을 때,그에 대한 응답으로 그녀는 자신에게만 지시된 예언을 받아서 그녀의 임신 자체가 문자 그대로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역사적이고 보편적인 차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두 민족이 네 뱃속에 있고 두 나라가 네 몸에서 나눠질 것이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강할 것이니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다.’


하쉠께선 그녀가 미래의 역사를 짊어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그녀의 자궁에 나라들을 품은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 역사 전체에 걸쳐 미래의 세상이 바로잡힐 때까지 남아 있어야 할 두 형제 사이의 적대감은 그들이 아직 그녀의 태중에 있을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미드라쉬는 이 출산 전의 역동성을 이야기의 다른 모든 것들처럼 문자 그대로 이해할 의도까지는 아니지만, 우리에게 여기서 단순히 두 아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훨씬 더 큰 역할을 하는 선수들을 대표하는 원형을 가지고 있다는 개념을 강하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묘사합니다.


미드라쉬의 말에 따르면 이러합니다: 에싸브가 야아코브에게 ‘와라, 너와 내가 세상을 나눠보자.’라고 하니 야아코브가 ‘당신이 이 세상을 가져가시오. 나는 다가올 세상을 가져갈 테니’라고 대답합니다.

에싸브는 그에 동의하며 ‘좋아, 너는 다가올 세상을 가져가고 나는 이 세상을 가져가겠다’라고 하고 나중에 장자권을 팔 때인 25:31, 33에서 야아코브는 에싸브에게 ‘그날처럼 당신의 장자권을 내게 파시오...그 날처럼 내게 맹세하시오’라고 말합니다.


두 구절에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는 문자 그대로는 ‘날과 같이’라는 의미인 카욤입니다.

이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단어에 대한 많은 해석이 있는데, 일부는 라쉬와 같이 단순한 의미의 수준을 찾기도 합니다.

그러나 미드라쉬에 따르면, 야아코브의 단순한 의도와 의미는 ‘먼저 당신의 장자권을 내게 파시오’라고 하며 그리고 ‘그 날처럼 내게 맹세하시오, 우리가 자궁에 있었을 때 그 날에 맺은 협상처럼’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무얼 의미할까요?

이 설명은 기발한 사색이 되기는커녕 놀라운 예고일지도 모릅니다. 카인과 헤벨(아벨)에 관한 불안함을 연상시키고, 카인과 헤벨이 그들 사이에 세상을 나누길 원했던 것처럼 말이죠.

우리는 베레쉬트(창세기) 4:8에서 ‘카인이 그의 형제 헤벨에게 말했다. 그들이 들판에 있을 때 그렇게 되었으니...’라고 배웠습니다.


유대 현인들은 ‘그들이 무엇에 대해 논했는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카인과 헤벨이 서로 말했다’고 말합니다.

“와라, 우리가 세상을 나눠보자. 우리 중 하나가 땅을 차지하며 다른 이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다.”

그리고 말하길, “너가 서있는 땅은 내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이 또한 말하길 “당신이 입고 있는 것은 내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한 사람은 옷을 벗으라 말하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 재산에서 비키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카인이 그의 형제 헤벨에게 일어나 그를 죽였다.’


결국 그것은 세계 최초의 살인으로 나쁘게 끝나버렸고, 이제 이 쌍둥이의 경우도 슈모트(출애굽기/탈출기) 4:22에서 ‘이쓰라엘은 내 아들, 곧 내 맏아들이다’라고 단호하게 선언하시는 하쉠의 뜻에도 불구하고 예언자 말락히(말라기)를 통해 ‘그러나 나는 야아코브를 사랑했고 에싸브를 미워했다’라고 선언하는 분께서 여전히 신성한 계획의 일부로 영원한 적대감의 소용돌이를 시작하게 합니다.


이번 파라샤는 그렇게 야아코브와 에싸브의 출생을 설명합니다.

‘그녀의 출산할 날들이 찼다. 보라, 그녀의 뱃속에 쌍둥이가 있었다.’


첫째는 완전히 털로 덮인 외투처럼 붉게 태어났고, 그들은 그를 에싸브라고 부르며 그 후의 그의 형제가 나오고 그가 손으로 에싸브의 발뒤꿈치를 잡고 있었기에 그의 이름을 야아코브라고 부릅니다.

그녀가 그들을 낳았을 때 이쯔학크는 60세였습니다.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그들’이란 표현은 첫째의 이름을 에싸브라고 불렀고, 그 뜻은 완료된/완성된 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유아였음에도 다 자란 성인 남성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일까요? 그것은 중요한 건 아닙니다.


토라는 에싸브 성격의 본질을 표현합니다.

‘만들어진 자, 완성된 자, 기다릴 필요 없이 지금 당장의 모든 것을 원하는 자’


그러나 야아코브에 관해서는 기록 구절에서 확인되지는 않지만 하쉠께서 직접 그의 이름을 야아코브라고 부르셨습니다.

거기엔 더 많은 뒷이야기가 있는데, 에싸브가 먼저 억지로 태로부터 나오면서 야아코브가 말을 듣지 않는다면 어머니를 죽이겠다고 위협합니다.

에싸브는 이 세상에서 주도권을 빼앗고 야아코브는 그 뒤를 쫓았습니다.


토라는 그들의 어린 시절에 대해 우리들에게 나눠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같은 집에서 자라고 같은 교육을 받았다고 추정하는데, 그 다음에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그 소년들이 15세 때라는 것입니다.


25:27에서 그 아이들이 커서 에싸브는 ‘사냥을 아는 들판의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며 야아코브는 ‘장막에 사는 순수한 사람’이었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이쯔학크는 아들이 그의 입으로 사냥한 것으로 인해서 에싸브를 사랑했고 리브카는 야아코브를 사랑했다고 전합니다.


야아코브는 양을 치는 장막과 토라의 장막인 ‘장막’에 거했지만, 사냥꾼은 필요에 따라 세상을 이용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강제로 원하는 것을 가져간 자였습니다.


현인들은 에싸브가 동물 뿐만 아니라 여성도 사냥했다고 가르칩니다. 다른 남자의 아내들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또한 아버지도 사냥했습니다.

‘이쯔학크는 에싸브가 그의 입으로 사냥을 한 것으로 그를 사랑했다.’


에싸브는 소금과 지푸라기의 십일조는 어떻게 지켜야 하는 지에 대해 물어 아버지를 기쁘게 하여 속였고, 아버지에게 그가 계명을 잘 지키는 자로 보이게끔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에싸브는 살인자이자 비교할 수 없는 잔인한 성범죄자였음에도 무고한 자, 심지어 의로운 자로 가장합니다.

그리고 갑자기 이상한 장면이 펼쳐지는데, 오늘 우리가 집중하고자 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25:29에서는 ‘야아코브가 수프를 끓였더니 에싸브가 들판으로부터 왔고 그는 지쳐 있었다’라고 전합니다. 여기에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많은 내용들이 있습니다.

토라의 구절들은 그들의 진정한 의미에서는 희박하지만 끝없이 단지 표면을 긁을 뿐이며, 우리에게 이야기의 뼈대를 제공해줍니다.

우리는 더 완전한 그림을 얻고자 거룩한 현인들의 가르침으로 조명된 내면의 차원을 더 깊이 들여다봐야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야아코브와 에싸브의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야아코브가 앉아서 렌틸콩 수프를 요리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현장에서 그 장면에 도착한 에싸브가 알고 싶어하던 것이었습니다.

에싸브는 야아코브에게 ‘오늘 무슨 일로 렌틸콩 요리를 하느냐?’라고 묻습니다.

야아코브는 그에게 ‘나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돌아가셔서 그를 위해 앉아 슬퍼하고 있다’라고 대답합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렌틸콩은 전통적으로 애도자를 위한 음식이고,상실의 고통과 순환을 완화시키는데 상징적으로 도움이 됩니다.

렌틸콩은 둥글고 세상도 둥급니다. 그 의미는 삶과 죽음이 우리 세상의 순환의 일부임을 기억하고 기쁨과 슬픔의 시간들이 있다라는 진리를 묵상케 합니다. 렌틸콩이 입이 없고 그것이 열려지지 않는 것처럼 애도자도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에싸브의 할아버지이기도 했는데 그는 어디에 있었다는 걸까요? 가족의 슬픔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일까요?


에싸브는 아브라함의 임종 자리에 없었는데,가족의 애도에 동참하지 않았고 눈물도 흘리지 않았습니다.그의 아버지가 애도하는데도 불구하고 감정의 동요 없이 냉담했습니다.

그는 그저 들판으로부터 ‘현장 활동’을 마치고 돌아옵니다.


에싸브는 들판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미드라쉬는 15세의 에싸브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만큼 충분히 성숙하다고 생각됨에도 그토록 피곤했던 이유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는 그것을 저지르기 보다는 목숨을 바쳤어야 하는 노아하이드의 토라의 기본 계명 두 가지를 어기면서 바쁜 하루를 보냈는데, 바로 약혼한 여자를 강간하고 그 약혼자를 살해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날에,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지난번 파라샤트인 하예이 싸라에서 말한 내용처럼 세상을 떠납니다.

그것은 하쉠의 타이밍이었는데, 하쉠께서 베레쉬트 15:15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 때문이었습니다.

‘너는 네 조상들에게로 평안히 갈 것이니,좋은 노년으로 묻힐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의 손자가 음행과 살인이라는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을 알면서 고통을 받으면 그게 좋은 노년일까요?

그래서 하쉠께선 그의 친절하심으로 아브라함이 그 날을 보지 못하도록 그를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더 있는데, 이 날에 에싸브는 실제로 5가지의 죄를 저지릅니다.

강간과 살인 외에, 그는 하쉠의 존재, 미래에 있을 죽은 자의 부활, 그리고 장자권을 경멸하며 부인하고 거부했던 것입니다.


에싸브는 들판에서 돌아와 야아코브에게 렌틸콩 요리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을 때 야아코브는 ‘내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돌아가셨고 나는 그를 애도함을 알려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기를 원한다. 미래에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날 때 그는 기뻐하게 될 것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에싸브는 그에 대해 반박하며 ‘이 어리석은 놈아! 사람이 죽고 무덤에서 썩어서 다시 살아난다고?’라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에싸브는 25:32에서 분명히 언급한 것처럼 ‘봐라, 내가 지금 죽겠는데 장자권이 내게 무슨 소용이냐?’라고 부활을 부인합니다.

그 말은 ‘내가 죽은 때 나는 그 죽음이 끝이고 그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하쉠도 없고 이 세상을 발전시킬 책임을 받아들일 관심이 없으니 내게 장자권은 무의미하다’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는 장자권이 ‘특권’이 아니라 이 세상에 대한 책임을 가져오게 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나서는 그에 대해 흥미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내게 그 붉은 것을 좀 먹게 하라.그러면 장자권을 줄 것이다.’

‘야아코브가 에싸브에게 빵과 렌틸콩 수프를 주니 그가 먹고 마시고 일어나 갔다. 에싸브가 장자권을 멸시했다.’

그는 이 세상에서 하쉠과 하쉠을 섬기는 것을 경멸했습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에싸브가 빵과 렌틸콩 요리를 장자권과 교환해 팔았다고 오해합니다.

그런데 구절을 면밀히 보셔야 합니다.


‘에싸브가 야아코브에게 말했다. ‘내가 지쳤으니 내게 그 붉은 것을 좀 먹게 하라.’ 그러므로 그의 이름을 에돔(붉은)이라고 불렀다.’


‘야아코브가 말했다. ‘먼저 당신의 장자권을 내게 파시오.’’


‘에싸브가 말했다. ‘내가 지금 죽겠는데 장자권이 내게 무슨 소용이냐?’’


‘야아코브가 말했다. ‘그 날처럼 내게 맹세하시오.’ 그리고 그가 그에게 맹세하고 야아코브에게 그의 장자권을 팔았다.’


‘야아코브가 에싸브에게 빵과 렌틸콩 수프를 주니 그가 먹고 마시고 일어나 갔다. 에싸브는 장자권을 멸시했다.’


이렇게 29절에서 34절 사이 어디에서도 렌틸콩 수프가 장자권을 팔기 위해 지불된 대가라는 얘기가 전혀 없습니다.


문자 그대로인 기록의 설명은 에싸브가 음식을 목에 부어 달라고 했는데, 그는 참을성이 없었고 즉각적인 만족에 집중했기 때문이었으며, 음식을 ‘붉은 것’이라고 무례하게 표현하고 이름을 부르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특성 때문에 하쉠께서도 그를 붉음을 의미하는 에돔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식사와 그의 행동에 대한 이 모든 주의는 그가 렌틸콩을 폭식한 것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그것은 훨씬 더 심각한 어떤 증상으로 우리에게 그의 존재의 핵심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을 제공해 줍니다.


토라는 그의 행동을 우리에게 교훈으로 강조합니다.

에싸브는 마치 그가 관심 갖는 모든 것이 자신의 욕망만을 충족시켜줄 것처럼 완전한 경멸과 모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먹었고, 그가 마셨고, 일어났고, 갔고, 그가 경멸했다’.

34절 한 구절에서만 토라는 5개의 짧은 동사를 사용해 에싸브의 행동을 빠르게 묘사합니다. 전체 문제에 대한 그의 경멸적 태도의 묘사는 우리를 확실히 혼란스럽게 만들어 줍니다.


‘붉은 것’은 에싸브가 야아코브에게 대가로 요구한 ‘비용’에 대한 암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음식은 판매용이 아니었습니다.

거래를 맺은 후에 식사나 술을 함께 나누는 것이 관례인 것처럼 그 음식은 계약 체결 후의 기념 음식처럼 단지 의식적인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토라의 기록에서 파라샤트 바예쩨의 끝 무렵인 베레쉬트 31장의 라반과 야아코브의 합의 후, 야아코브가 그 조약을 증거삼고자 기념비로 세운 돌무더기에 대해 31:54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야아코브가 산에서 희생제물로 제사 드리고 빵을 먹으라고 그의 형제들을 불렀다. 그들이 빵을 먹고 산에서 묵었다.’


야아코브와 에싸브, 그리고 그들이 대표하는 모든 것은 낮과 밤처럼 다릅니다.

에싸브는 원기왕성한 사냥꾼이며, 사냥꾼은 본래 주지 않고 가져갑니다. 그리고 자원을 개발하지 않고 활용합니다.

에싸브의 방식으로 사냥하는 것은 스포츠와 즐거움을 위해서와 권력을 위한 그의 조건으로, 세상의 운명과 세상의 개선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고, 그 사냥은 인류의 가장 심각한 질병인 이기주의를 대표하게 되었습니다.


토라는 야아코브를 ‘장막에 사는 순수한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쉠과 에베르의 ‘토라 공부의 장막’과 ‘목자의 장막’에서 하쉠의 토라에 대한 그의 영적 직업을 대표함과 동시에 토라의 의미와 가치를 세상에 가져오려는 그의 목표를 나타냅니다.

그는 처음에는 아버지의 가축 떼를, 그 다음에는 라반의 가축 떼를 돌보았으며, 마침내 자신의 가축 떼를 돌보기 전까지는 세상의 발전과 개선에 헌신했습니다.


장자권을 팔았던 것은 세계의 분할을 의미하는 분열 행위였고, 그것은 에싸브와 야아코브 사이의 투쟁의 표현으로 자궁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즉,그것은 그들 존재의 본질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싸브가 주장한 세상의 물질적 측면과 야아코브에게 할당된 영적 측면 사이의 구분, 그것은 로마 문명으로 알려지게 될 에싸브의 파괴적이고 나르시시즘적인 문화와, 이스라엘의 문화 사이로써, ‘이 세상’과 ‘다가올 세상’사이의 구분이었습니다.


이 두 반대 세력은 끊임없는 투쟁에 갇혀 있고, 모든 사람에게 이 세상에서 하쉠의 빛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그것을 은폐하는 데에 참여하는 그 사이에서 선택을 하게 하고 그 투쟁에 편을 들도록 도전을 던집니다.


라브 하임 리치만 Rabbi Chaim Richman

번역: 아담 리 (유대교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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