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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샤트 테짜베 5783 '가면 무도회'

샬롬, 즐거운 명절인 푸림(부림절)을 이제 다음 주에 기념하게 됩니다.

푸림 바로 직전에 있는 이 안식일에는 ‘기억의 안식일’이라는 의미인 샤바트 작호르라는 특별한 안식일을 기념합니다.

윤년을 제외하면, 이번 파라샤트 테짜베는 이 안식일에 가장 많이 읽힙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푸림의 주요 주제 중 하나는 ‘우연’이란 건 없다는 것입니다.

푸림 자체의 이야기처럼 테짜베와 푸림 기간의 합류는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모두들 푸림엔 코스튬을 입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번 파라샤 또한 거룩한 성전에서 섬기는 이들인 대제사장과 일반 제사장의 모든 의복과 장신구들에 대한 것으로 가득 차 있죠.


그런데 그게 푸림과 무슨 상관일까요?


‘세상’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올람(עולם)의 어근은 ‘숨김’을 의미합니다.

거룩한 유대 현인들은 이 세상이 하쉠을 ‘숨기는’ 것으로 인해 사실 이 세상 전체가 변장 상태로 ‘코스튬’ 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온 세상이 진실의 이면을 가리는 ‘가면’이기에, 하쉠의 끝없는 빛을 가려 모두를 혼란스럽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들, 우리가 겪는 모든 것들, 우리 자신을 포함해 우리가 처리해야 하는 모든 것들로 우리는 ‘가면 무도회’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 모두가 항상 코스튬을 입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평생동안 대규모의 공연 예술에 참여하는 것과도 같아서, 1599년에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그의 희곡 ‘당신이 좋아하는 대로’ 2막 7장에서 ‘온 세상은 무대이고, 모든 남녀는 단지 연기자일 뿐이다’라고 쓴 것과 같을 정도입니다.


마음을 한 번 열어보세요.

이번 주의 토라 부분은 코스튬의 비밀을 포함해 우리의 육체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겉모습 너머를 보는 것인데, 토라가 바로 드바림(신명기) 4:35장에서 ‘엔 오드 밀바도’, 즉 ‘그분 외에는 누구도 없다’라고 말하는 바와 같이 유일한 참된 실재이지만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 극장의 한복판에서 우리가 코스튬의 장벽을 허물 수 있다면, 그리고 모두의 영혼이 연기와 거울을 통해 빛나게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기억할지 모릅니다.


이 세상은 실로 기억과 망각이라는 이상하고 경이로운 이분법의 인질인데, 이 물리적 세상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잊도록 프로그램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토라는 드바림 6:12에서 우리에게 경고하기를, ‘너는 하쉠을 잊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가 속박의 집 미쯔라임 땅으로부터 너를 나오게 하셨다.’라고 말해줍니다.


이게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모든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을 잊는 것은 너무도 쉽죠. 토라는 실재하는 유일한 것을 잊어버릴 정도까지 깊은 망각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그분께서 시나이 산에서 유대 민족에게 ‘나는 하쉠, 너희의 엘로킴이다’라고 말씀하셨듯 그것을 ‘기억하는’ 것은 자유였으며, 그것을 ‘잊음’은 미쯔라임의 노예였습니다.


이 세상에선 기억하는 힘과 망각하는 힘 사이에 끊임없는 싸움이 벌어집니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모든 체류는 ‘기억’에 묶여 있기에, 토라는 기억에 초점을 맞춘 계명으로 가득 차 있는데, 이 기억의 안식일을 위한 특별한 추가 토라 ‘마프티르’ 부분에서 우리는 드바림 25장의 끝부분을 읽습니다.

‘너희는 미쯔라임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너에게 행한 것, 그가 너를 길에서 만나 네 뒤에 뒤쳐진 모든 자들을 쳐 죽인 것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 구절은 계속해서 ‘너는 하늘 아래에서 아말렉의 기억을 지워야 한다. 너는 잊지 말아야 한다.’라고 언급합니다.


‘껍질’이라는 의미의 ‘클리파’라고 불리는 아말렉의 부정적인 대향력은 우리의 영적 기억력의 가장 큰 적이었습니다.

아말렉의 게마트리아 숫자값은 240으로, ‘의심’을 뜻하는 단어인 ‘싸펙’의 숫자값과 같은데,

그 모든 세대 동안 아말렉은 의심과 불신의 씨앗을 뿌려 우리로 하여금 ‘하쉠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의미의 ‘엔 오드 밀바도’를 잊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아말렉은 당신이 포기하도록 설득하려고 노력하면서 그 구절이 말하는 것처럼 ‘길을 따라 일어났’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단지 무작위적인 우연의 일치, 집으로 향하는 올바른 방향이 없는 세상, 신성한 인도와 섭리가 없는 세상이라는 것을 당신에게 확신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기억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잊지 말고, 기억하고, 현실에 안주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고,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고 교활하게 귀에다가 속삭이는, 우리를 의심케 하는 의혹이라는 우리 안의 가장 큰 적을 파괴하기 위해 경계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무작위’라는 것이 없습니다.


하쉠의 유일성은 독특하고 완전한 단일성이지만, 그분은 다양한 이름과 다양한 모습으로 그분의 창조물과 관련을 지니는데, 앞에서 다룬 바와 같이, 그것은 마치 남에게 잘 보이고 싶은 옷을 고르는 이와 같습니다.


하쉠의 빛은 무한합니다.

너무도 위대해서, 그분께서 그것을 줄여야 할 정도로 위대합니다. 그분은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하게,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도달케 하기 위해 말 그대로 그 강도를 낮춥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하쉠께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때는 그분이 ‘숨길 때’만 가능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창조의 현실을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는데, 바로 창조주께서 숨어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전에 이 숨바꼭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예언자 예샤야후(이사야)도 그것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는 45:15에서 그것을 얘기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자신을 숨기시는 신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엘로킴이 구원자이십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에게 자유 선택의 모든 가능성을 부여해 주는 것은 바로 이 현실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통해 그분이 숨지 않으신다고 결론 짓고 단순하게 그분이 여기에 전혀 없다라고 말합니다. 또는 “창조주가 누구냐? 창조주 같은 건 전혀 없다”라고 말하기도 하죠.

그것은 그들의 선택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의제에 맞는 편리한 결론을 찾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자유롭다’라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의 내적 부패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호셰아 예언자는 자신의 책의 결론에서 모든 인간의 상태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누가 지혜로워서 이것들을 깨달으며 분별하여 그것들을 알겠느냐? 하쉠의 길들은 올곧으니 의인들은 그들 안에서 걸어가고 범죄자들은 그들 안에서 넘어진다.’


유대 현인들은 ‘토라에서 에스테르(에스더)가 언급된 곳은 어디인가?’라고 질문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드바림 31:18에 답이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가 행한 모든 악 때문에 내가 그 날에 내 얼굴을 숨길 것이니...’


히브리어로 ‘그러나 나는 숨길 것이니’라는 말은 ‘바아녹히 하쓰테르 아쓰티르’로, 에쓰테르(אסתר)와 같은 단어에서 파생된 언어 유희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숨기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하쉠의 진정한 ‘얼굴’은 오직 친절입니다.

그러나 때로 그분께선 창조물인 인간의 유익을 위해 슈모트(출애굽기/탈출기) 33장에서 모셰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그 자신을 바꾸어 오직 우리에게 ‘그분의 등’만을 보이십니다.

그 의미는 우리는 사실이 벌어진 후에야 그분의 구원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푸림의 이야기에서 모르덱하이(모르드개)와 에스테르 시대의 하쉠의 숨기심의 전체적인 목적은 이스라엘의 가장 큰 암흑 중 한 가운데서 우연한 자연적 사건으로 보이는 현상 가운데 어떻게 하실지를 드러내는데 있습니다.


창조주께선 완전히 기적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삶의 모든 세부 사항을 다스리고 지시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푸림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교훈 중 하나이고, 일 년 내내 동안의 우리의 영적 과제가 됩니다. 그분 외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 그분께서 ‘실재의 실체’라는 사실을 감추고 계신다는 것을 말이죠.


이제 여기서 가장 깊이 마음을 열어보세요.

창조주께서 이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시기 위해 자연의 옷을 입으신 것처럼 모든 영혼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바로 여기에 세상에서 가장 깊은 비밀이 있습니다.


연간 주기로 변장을 하는 푸림의 세상에서 가장 큰 변장은 ‘우리의 몸’입니다.

영혼은 세상에 오기 전에 자궁에 있는 동안 ‘의상’이 형성되고 그 형태를 갖추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매우 심오한 것으로, 이요브(욥)는 10:11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당신께선 가죽과 살을 제게 입히시며 당신께선 뼈들과 힘줄들로 저를 덮으셨습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의 몸과 너무 많이 동일시 시킴으로 완전히 혼란에 빠져 우리가 보는 이 외형이 우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육신은 영을 위한 ‘의복’에 불과합니다. 그것 없이는 영이 이 세상에서 전혀 드러날 수 없는 겁니다


영은 영원하며 의복은 일시적입니다.

영혼은 가장 높은 곳으로부터 나와서 자궁에서 아홉 달을 보내고 이 세상에 들어갈 준비를 하죠.

유대 현인들은 이 출생 전 시기의 영의 빛, 그 촛불이 태어나지 않은 태아의 머리에 은유적으로 ‘켜지며’, 그 빛으로 아이는 세상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을 볼 수 있음을 가르치며, 그는 그 때 토라 전체를 배운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아이가 자궁을 빠져나와 이 세상의 영공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천사가 그의 입을 두드려 그가 배웠던 모든 토라를 잊게 만듭니다


그럼 태 안의 아이는 죄를 짓기 이전인 첫 사람 아담의 영적인 시각 수준에 있었는데 하쉠께선 왜 어차피 그가 태어나기 전에 토라를 잊어버리게 만들려 함에도 토라 전체를 가르치셨던 걸까요?


저는 이것이 하쉠의 지식과 우리의 관계가 영적인 차원에서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항상 그것을 알고 있고, 따라서 우리가 그분을 새롭게 발견할 때 토라 공부를 통해 우리가 한때 ‘알았다고 한 것’들을 평생 다시 배웁니다. 토라 연구는 데자뷰의 경험인 것이죠.


기억하고 또 잊어버리는 이분법이 있는데, 이제 여기서 당신의 마음을 더 깊이, 훨씬 깊이 열어보세요. 왜냐하면 이제 여기에서의 요점으로 유대 현인들의 가르침처럼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토라를 잊게 만드는 천사의 개념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궁을 나와 이 세상에 들어가서 육신의 옷을 입는 바로 그 행위가 망각에 관한 것임을 보았습니다. 출생과 육신은 진정한 현실을 잊게 하기 위해 사람의 프로그램을 돌립니다.


잊는다는 것은 이 세상의 일입니다. 몸의 의복은 우리의 영을 잊게 만듭니다.

그것은 우리를 창조주로부터 분리시키는데 항상 그런 것은 아니고, 우리는 또한 항상 변장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겪는 이 분리의 과정은 에덴에서의 아담과 하바의 실수의 결과였습니다.

실제로 알게 하는 나무를 먹기 전엔 육신이 분리의 원인이 되지 않았었습니다. 의복도 필요하지 않았었죠.

의복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은 베레쉬트(창세기) 3:7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자 그들 둘의 눈이 열려 그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이 무화과 잎을 엮어 그들을 위해 치마들을 만들었다.


의복은 인간이 하쉠을 배신한 결과 그 수치심에서 탄생했습니다.

의복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 ‘베게드’는 배신을 의미하는 ‘보게드’와 관련이 있습니다.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 것은 권력을 찬탈하고자 하는 인간의 시도였고, 그것은 하쉠의 숨김과 분리의 환각을 야기했습니다.


이제 파라샤트 테짜베로 돌아가서, 하쉠께서 그분의 성소를 위해 모셰에게 계속 지시하는데, 에덴을 바로잡는 곳, 하쉠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기억하는 본부, 그리고 창조주와 연결되는 중심지로 거룩한 성막의 모든 것은 ‘다시 고치는 교정’을 의미하는 ‘티쿤’에 영향을 미치고 활성화가 됩니다.

성막과 그곳에서의 섬김은 사람이 하쉠과 연결될 수 있는 완벽한 세상의 모델 역할을 합니다.


아하론(아론)의 후손인 제사장 가문 ‘코헨’들은 신성한 섬김을 통해 세상에 축복을 전달해 줍니다. 모든 창조물의 조화를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정체성과 그 섬김의 타당성은 그들의 ‘의복’과 연결되어 있고, 거룩하게 디자인 된 제사장 의복은 의복이라는 개념 자체를 수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옷은 변장도, 의상도 아니며, 오히려 분리됨을 붙잡아주는 고정의 매개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배신을 바로잡고 충실함을 고취시키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이것은 매우 깊은 가르침으로, 유대 현인들은 제물이 속죄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제사장복도 속죄를 불러오고 우리의 분리로 인한 죄를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되는 것임을 가르치는데, 속옷은 피 흘린 죄를 속죄하고 바지는 음행의 죄를 속죄하며, 터번은 교만을 속죄하고, 띠는 부정적 생각을 속죄하며 정의를 행하는 유산인 흉패 ‘호쉔’, 그리고 우상 숭배를 속죄하는 에포드, 험담을 속죄하는 겉옷, 뻔뻔함을 속죄하는 황금 머리판 찌쯔 등이 그 역할들입니다.

코헨은 이 의복을 입음으로써 온 세상의 조화와 균형이라는 영적 과정에 영향을 미치도록 돕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억의 안식일임을 기억하고 잊지 말아주세요.

아말렉과의 첫 전투에서 우리는 슈모트 17:13에서 이렇게 보았습니다:

‘예호슈아가 아말렉과 그의 백성을 칼날로 약하게 했다.’


왜 그저 약하게 했다는 걸까요? 예호슈아는 왜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았나요?

사실, 아말렉과 망각의 힘은 너무도 강해서 완전한 구속의 때까지 멸망시키는 게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것을 약화시키는 것인데, 왜냐하면 아말렉에 대한 완전한 승리는 하쉠에게만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토라가 17:16에서 말하듯 ‘그분의 전쟁’입니다.

‘하쉠께서 모셰에게 말씀하셨다. “책에 이것을 기념으로 기록하고 예호슈아의 귀에 ‘내가 반드시 하늘 아래에서 아말렉에 관한 기억을 지울 것이다’라는 것을 낭독하라”...’신의 보좌 위에 손이 있고, 하쉠의 전쟁이 대대로 아말렉에 있을 것이다.’’


푸림 전의 기억의 안식일인 ‘샤바트 작호르’에 우리는 이 아말렉의 껍질들이 우리를 붙잡고 있는 힘을 약화시키고 우리의 거룩한 기억력, 믿음과 신뢰의 힘을 강화할 기회를 얻습니다.

그분 외에 다른 이가 없다는 것과, 유대 조상들에게 기적을 일으키신 분께서 계속해서 우리들에게 기적을 일으키실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브 하임 리치만 Rabbi Chaim Richman

번역: 아담 리 (유대교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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