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파라샤트 테루마 5783 '케루빔은 무엇인가?'

샬롬, 이번 주 토라 부분은 슈모트(출애굽기/탈출기) 25장부터 시작하는 파라샤트 테루마입니다.

이번 파라샤에서는 성막과 그 물건들과 비품들을 만들기 위한 지시가 내려집니다.


하쉠께서는 25:8에서 ‘그리고 그들이 나를 위하여 성소를 만들 것이니 내가 그들 가운데 머무를 것이다.’라고 하신 것처럼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실 성소 미크다쉬를 건축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임재를 지상에 거하게 하고자 하는 하쉠의 열망에 대한 이 개념은 창조의 주된 목적이었으며, 마침내 이 숭고하면서도 지상적인 목표를 실현할 때가 됩니다.


거룩한 성전은 후에 예루샬라임의 모리야 산에 세워집니다. 그 영원한 장소는 한때와 미래에 하쉠께서 이 세상에서 그분의 존재를 머물게 하고자 선택하신 곳입니다.

한편, 이 계명은 처음엔 성막을 통해 성취되는데, 견고하면서도 동시에 쉽게 조립 및 분해할 수 있도록 설계된 휴대용 성막은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머무르는 동안 받는 신성한 여정의 지침에 따라 이동할 수 있게 준비됩니다.


슉히나, ‘신성한 임재’가 성막과 기물들을 통해 여기에 드러납니다.

그 각 측면과 세부 사항들엔 의미와 중요성들이 가득 차 있는데, 그것은 신성한 섬김에서 각각의 특정한 수준들에 상응하는 계시의 수준입니다.


슉히나 임재의 주된 나타남은 증거궤의 위쪽 판인 카포레트 위에 놓인 두 크루브 사이에서 발생합니다.

증거궤는 ‘지성소’로 알려진 성막의 가장 신성한 부분, 코데쉬 하코다쉼에 위치해 있으며, 크루브들의 날개는 증거궤의 윗부분을 덮습니다.


토라는 여기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는 금으로 크루브 2개를 만들어야 한다. 너는 그것들을 두들겨 만들어서 판의 양쪽 끝에 만들어야 한다...너희는 크루브들을 판으로부터 그것의 양쪽 끝에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크루브들은 날개들을 위로 펴서 그들의 날개들로 판 위를 덮으며 그들의 얼굴들은 서로 마주해야 한다. 크루브들의 얼굴들은 판 쪽으로 향해야 한다.’

‘너는 판을 궤 위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 궤 안에 너는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두어야 한다.’


크루브들은 모셰와 하쉠 사이의 ‘만남의 장소’로서의 역할을 하고 그곳은 25:22절이 말하는 것처럼 모셰가 하쉠의 음성을 들을 곳이 되었습니다.

‘내가 거기서 너와 만나기로 하며 내가 그 판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크루브 사이에서 너와 말하리니 내가 이쓰라엘 아들들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나중에 라쉬가 설명하듯, 더 구체적으로는 모셰가 지성소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성막에 들어가는 입구를 통과할 때 하늘에서 음성이 내려와 크루브들 사이에 자리를 잡은 것이었고, 만남의 장막에서 모셰에게 들려온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바미드바르(민수기) 7장 끝에도 요약되어 있는데, 우리는 거기서 ‘모셰가 그에게 말씀드리려고 회막에 왔을 때 증거궤 위의 두 크루브들 사이에 있는 판 위에서 그에게 말씀하시는 소리를 그가 들었다.’라고 읽습니다.

실로 이 구절들의 단순한 의미는 성막의 주요 목적이 바로 이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기 위한 만남의 장소라는 것에 있습니다.


하쉠께선 타낙흐 내에서 ‘크루브 위에 거하시는 분’으로 언급되고, 이 표현은 슈무엘(사무엘) 상 4:4과 트힐림(시편) 80, 99편에서 처음으로 접할 수 있습니다.


성막 안에서의 크루브들과 그들의 기능에 대한 이 전체적인 주제는 깊고 포괄적인 공부와 많은 숙고가 필요로 합니다.그러니 여기서 마음을 한 번 열어보세요.

우리는 하쉠께서 모셰와 얘기한 곳이 그들의 장소였음을 압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대화가 성막 안에서의 신성한 계시의 정점이었음을 압니다.


거룩한 유대 현인들은 거하심의 본질과 신성한 임재에 대한 유일한 계시에 대해 다양한 생각을 반영하는 많은 가르침들을 공유합니다.

이번에 우리는 이 놀라운 주제의 한 가지만 검토해 볼 것이며, 이와 같이 제한된 시간 안에서의 나눔으로는 결코 그 전체를 정의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크루브들에 관해서는 다른 세부 사항과 차원, 그리고 질문과 답변이 너무 많아지기에 (하쉠의 도우심으로) 다른 시간에 더 논의하게 될 것임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일단 이 크루브들은 정확히 ‘무엇’일까요?

이런 개념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우리는 토라가 하쉠의 진리임을 상기시켜주고 토라에 적절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하기 위해 토라가 많은 수준의 의미를 내포함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바로 단순한 의미부터 암시들, 정의, 내적 의미들이 그것들입니다. 그리고 거기엔 은유와 비유도 있고, 이는 기록 토라와 구전 토라 모두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미슐레이(잠언) 1:6에서는 ‘예시와 비유를 깨닫고 현인들의 말과 그들의 수수께끼들을 이해한다.’라고 설명합니다.

거룩한 빌나 가온은 이 구절에 대해 논평하면서, 현인들의 모든 설교적 가르침은 피상적인 수준을 넘어 그 내적 의미들을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의 유명한 ‘난처한 자를 위한 안내서’에서 그는 미슐레이의 이 동일한 구절에 대해 언급하고, 람밤(마이모니데스)은 토라를 이해하는 과정을 미슐레이의 다른 구절인 25:11에비유합니다:

‘합당한 말은 은도금한 접시에 담긴 금사과 같으며’

그 의미는 ‘겉으로 보기에 육안으로 보는 것이 귀하고 아름다울지라도 그 안에 감추어져 있는 은의 미세한 틈을 통해 반짝이는 것은 금에 비해 훨씬 경이롭다’라는 뜻입니다.


크루브들은 천사의 일종으로, 날개가 달린 새의 몸을 한 형상입니다.

유대 현인들은 그 얼굴들이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어린이 얼굴이라고 가르치는데, 우리는 표면적으로 그 크루브들의 상징성과, 특히 지성소에 대한 그들의 위치가 신성한 계시에 의해 전달되는 이상적인 개념과 정반대인 ‘이상한 것’으로 보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질문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데, 우선 그것들이 ‘형상’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형태의 묘사는 열 가지의 말들(십계명)에서도 명백히 금지되지 않았나요?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이나 어떤 모양의 새긴 우상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파라샤트 이트로의 슈모트 20:4에서 들었습니다.


하쉠께선 왜 자신의 명령을 포기(?)하고 그런 형상을 합법화 하신걸까요?

특히 다른 곳도 아닌, 모든 장소 중 그분께서 머물기로 선택한 장소인 그분의 신성한 임재의 영광이 있는, 자신을 계시하고 자신의 음성을 모셰에게 알리신 곳에서 말입니다.


이제 여기서 질문이 더 깊어집니다. 마음을 더 깊이 열어보세요.

현인들에 따르면, 그 두 크루브들은 기적적으로 ‘친밀한 포옹’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가르칩니다.

그마라(탈무드) 요마 편 54에서 라브(랍비) 카티나는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명절에 맞춰 거룩한 성전으로 순례할 때에 모든 백성이 함께 모이면 제사장들이 지성소의 휘장을 걷어 크루브들이 보이도록 했다’


라쉬는 크루브들이 남자가 여자를 껴안듯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은 이스라엘에게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처럼 여러분이 얼마나 하쉠께 사랑받는지를 보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은 기적이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두 크루브들이 만들어졌는지가 아니라, 하쉠께서 그들이 어떻게 보여지는지를 원했던 방식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크루브들의 포옹은 친밀감을 의미하는데, 이 물리적 세상에서 좀스럽고 이기적이며 그러한 사고 방식에 의해 인식이 제한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심각하게 오해할 수준의 친밀감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심각한 오해’라는 것이 바로 같은 출처로부터 유대 현인들이 묘사했던 정확한 시나리오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레쉬 라키쉬는 ‘적군이 성전을 파괴하고자 성전에 들어갔을 때 크루브들이 껴안고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을 시장판으로 끌고 가 이스라엘을 조롱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그녀를 존중하던 모든 자들이 그녀를 멸시하니 이는 그들이 그녀의 하체를 보았기 때문이다.’라고 한 엑하(예레미야 애가) 1:8의 내용과도 같았습니다.


표면적인 수준에서, 남성과 여성이 포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룩한 성전의 가장 신성한 장소에 대한 이 묘사는 너무도 거룩해서 대제사장 한 명만 일 년에 단 한 번인 욤 키푸르에 그곳에 들어가는 곳임을 안다면 외견상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로 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만약 코데쉬, 즉 ‘거룩함’의 개념이 물질과 구별되고 경건과 연결되는 분리에 관한 것이라면 ‘거룩함의 정점’이라는 개념을 지닌 지성소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요?


라브 쿡은 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는데:

세속적인 세상과 거룩함의 세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세상이 서로 상충되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충은 오직 우리의 관점에서만입니다.


우리의 이해력은 제한적이어서 우리는 상반되는 두 가지를 연결할 수 없고, 모호함 사이의 조화를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거룩함은 이 세상의 일부가 되도록 또한 의도되었고, 지성소는 그 특이점입니다.

그곳은 이 세상의 모순된 본성을 뛰어넘어 가장 깊고 순수한 연결을 드러내 줌으로써, 가장 큰 완벽을 이끌어내는 능력을 표현하는 연결점입니다.


지성소에 계시된 창조물(크루브들)에 스며든 거룩함의 진정한 실재는 우리의 제한된 개념을 초월하고, 그렇기에 오직 대제사장만 욤 키푸르에 그곳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만이 지성소의 의미를 이해하고 현실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이제 여기는 크루브들의 가장 깊은 진리를 표현할 자리니 잘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남성과 여성의 결합, 곧 그것이 순결함과 거룩함으로 나타날 때 이 세상에서 거룩한 잠재력의 한 방면이 되어줍니다. 그래서 그 자리는 지성소 안에 있는 증거궤와 함께 있는 것이 됩니다.


남녀 어린이로 묘사된 크루브들의 얼굴은 아직 죄를 경험하지 않은 나이의 순진함을 암시해 줍니다. 그리고 토라는 그 특정 형태가 거룩하고 복되신 분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영원하고 순수하며 더럽혀지지 않은 사랑을 전달해야 함’을 명령합니다.


우리는 천사가 아니라 인간이죠.

하쉠께선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토라를 인간에게물려주셨고, 인간과 함께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쉬르 하쉬림(아가서)에서 슐로모 왕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에 대한 은유를 통해 하쉠의 사랑을 비교해 줍니다.

가장 숭고한 사랑, 그 영적인 차원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지만 그것을 물리적 묘사로 표현했죠.

토라의 가장 깊은 비밀이 결혼하지 않은 자들에게 ‘접근 금지’로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가르친 유대 현인들도 그와 비슷한 개념을 표현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의 참되고 순수하며 거룩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하쉠의 사랑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의미는, 지식으로 변하는 그 경험이 없다면 가장 깊은 수준에서 하쉠과 연결되는 감정적, 정신적, 심리적 배포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미슈나에서 위대한 라브 아키바가 가르치는 놀라운 가르침의 의미입니다:

‘온 세상은 쉬르 하쉬림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날에 비하면 가치가 없으니, 이는 토라의 모든 책이 ‘성소’라면 쉬르 하쉬림은 ‘지성소’와 같기 때문이다’


여기서 마음을 더 깊이 열어보세요. 이것이 정확히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인간성’은 가장 순수한 형태로 이 세상에서 그분의 존재를 거하게 하는 하쉠의 기초이며, ‘나를 위하여 성소를 만들 것이니 내가 그들 가운데 머무를 것이다’라는 것의 본질입니다.


거룩하신 분께선 모든 장소 중 가장 은밀하고 친밀한 ‘하늘과 땅이 만나는 지점’인 거룩한 영적 세상과 물리적인 세속 세상이 조화를 이루는 지성소, 그곳의 크루브들 사이에서 만나 말씀하시기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트힐림 85편의 ‘친절과 진리가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맞춘다.’라는 말씀처럼 스스로의 물질주의를 넘어 거룩으로 도달할 수 있는 인간의 잠재력을 바라봅니다.


라브 하임 리치만 Rabbi Chaim Richman

번역: 아담 리 (유대교 TV)

Related Posts

See All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