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샤트 노악흐 5783

샬롬, 이번 주 토라 부분은 베레쉬트(창세기)의 두 번째 부분인 파라샤트 노악흐(노아)입니다.

베레쉬트의 첫 번째 부분은 우리를 아담의 10대손으로 이르게 합니다.

창조는 훌륭하게 시작됐으며,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 때 아담과 하바(하와)는 하쉠께 불순종하며 지식의 나무를 먹었지만,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었는데, 조정이 이루어지면서 이제 인간은 그의 내부 구성의 일부가 된 인간의 악한 성향인 ‘예쩨르 하라’의 반대 세력의 내적 차원의 도전을 받으며 하쉠을 섬기게 됐습니다.


그러나 파라샤트 베레쉬트의 부분이 끝나갈 무렵엔 인류 전체는 끔찍한 실망이 됩니다.

인간의 악은 너무 심해져서 모든 창조물이 그에 물들었습니다.

의로웠던 노악흐를 제외하고는 인류는 완전히 하쉠을 등졌으며, 인간의 영향으로 모든 창조물과 심지어 물리적 세계 자체가 회복불능일 정도로 타락해 버렸습니다.


우리는 6:5에서 배울 수 있는데, ‘하쉠께서 사람의 악이 땅에 많고 그의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의지가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셨다.’입니다.

그리고 하쉠께선 땅에 사람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시고 슬픔에 잠기셨습니다.

‘하쉠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지면 위에 창조한 인간을 지워버릴 것이니 사람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하늘에 나는 것까지 내가 그들을 만든 것을 재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악흐는 하쉠의 눈에 은혜를 입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모든 것이 이해할 수 없는 것 같이 보입니다.


창조의 이야기는 매우 긍정적으로 끝났었습니다.

거룩하고 복되신 분께서 세상을 응시하며 토라는 ‘보라, 그것이 매우 좋았다’라고 증언합니다.


하쉠께선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완전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트힐림(시편) 104:31엔 ‘하쉠의 영광이 영원 하십시오. 하쉠께서 그의 만드신 것들로 인해 기뻐 하십시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쉠 자신의 크나큰 기쁨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기쁨은 말 그대로 슬픔으로 바뀌었는데, 창조를 ‘매우 좋은 것’으로 요약하는 것이 ‘온종일 악하기만 한’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첫 번째 질문은 ‘어떻게 이 세상이 타락하여 완전히 무너지고 악으로 가득 차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는가?’입니다.


하쉠께서는 이제 자신이 창조한 온 세상을 멸망시켜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게 될 정도로 절망적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하쉠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분에게 반항할 사람들로 살게끔 했다’라는 논리가 대체 무엇일까요?

그토록 아름다운 잠재력을 지닌 그 분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어떻게 그토록 악해질 수 있고 계속해서 회복불능일 정도로 사악해져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으로 도달해 하쉠께서 그 모든 것을 막고 다시 시작하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여기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것이 바로 첫 번째 질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은 이제...마음을 한 번 열어 보세요, 우리는 여기서 하쉠께서 인간의 악함을 보고 진심어린 슬픔을 느끼며 인간을 창조하셨던 걸 재고/후회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뜻이죠? 그 분이 놀랐다는 겁니까? 그 분이 전혀 모르셨을까요? 그 분은 신 아닙니까? 그 분께선 그런 일이 올 것을 보지 못했단 것인가요? 그리고 또한 하쉠께선 슬픔을 느끼는 인간이 아니며, 그런 점을 후회하고 표현하는 인간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오래된 질문입니다.

탈무드는 위대한 현인 중 한 명이었던 라브(랍비) ‘예호슈아 벤 카륵하’와 그에게 질문을 던졌던 이교도인 간의 대화를 나눠줍니다.


그 이교도인이 현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들 유대인들은 창조주께서 미래를 아신다고 믿지 않소?’

라브가 대답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 분께서 미래를 아신다고 믿습니다.’

질문자는 계속해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토라는 왜 하쉠께서 땅에서 인간을 창조한 것을 후회하시고 진심으로 슬퍼했다고 진술하오? 그가 이런 결과일 줄을 미리 알았더라면 왜 그것을 계속해야만 했소? 그는 왜 처음에 사람을 창조했던 것이오?’

라브 예호슈아가 그에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에겐 자녀가 있습니까?’

이교도인이 대답했습니다. ‘그렇소, 내겐 아들이 하나 있소.’

라브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당신은 무엇을 했나요?’

그 사람은 ‘나는 축하를 해주었고 내 친구들 역시 함께 축하해 주었소.’라고 답했습니다.

라브가 물었습니다. ‘왜 그랬죠? 언젠가 그의 때가 되면 당신의 아들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몰랐나요?’

그러자 이교도인이 대답합니다. ‘그렇소. 물론 나는 그것을 압니다. 그러나 기쁨의 시간엔 기뻐할 수 있지 않소? 애통할 때는 애통하고.’

라브 예호슈아는 ‘그것이 바로 하쉠께서 여기에서 말한 바와 같소.’라고 말했습니다.


단순한 겉치레에 속하는 것 같은 이 일화는 심오한 교훈을 전달합니다.

하쉠께선 사람이 잘못될 수 있음을 아주 잘 알고 계셨습니다.


자, 가장 깊이 한 번 마음을 열어보세요.

두 질문들에 대한 설득력 있는 답변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 의지라는 것은 비할 데 없고 영향력 있는 힘인, 그의 신성한 선택 능력이다’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자기 자신을 개선시킨다면 당신은 반드시 용서 받을 것이다.’

하쉠께선 베레쉬트 4장에서 카인(가인)에게 말합니다. ‘만약 네가 좋음을 행하지 않는다면 죄가 입구 앞에 웅크리며 그 욕망이 너를 향하나 너는 그것을 다스릴 수 있다.’


드바림(신명기) 30장은 우리에게 ‘내가 오늘 생명과 좋음, 죽음과 악을 네 앞에 주었으니...너는 생명을 택해야 한다.’라고 권고합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하쉠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희망입니다.


그 분께선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할 것을 강력히 촉구합니다.

그러나 그 분께선 우리의 결정엔 간섭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지적인 역설에서 하쉠께선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지 알고 계시지만, 우리 행동의 결과를 결정하지는 않으십니다.

말하자면 그 분은 뒤로 물러서서 우리의 선택을 전적으로 우리에게 맡기는데, 이것이 하쉠께서 우리를 시험하시고 우리 앞에 두는 선택들에 끊임없이 맞서고 올바른 선택을 하게 하기 위한 이 ‘신성한 은닉’의 세상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의 기초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사람의 기능과 임무는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 각자를 포함한 모든 인류가 만약 토라가 모든 창조물에 대한 자신의 책임에 대해 가르친다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그건 정말 엄청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자 이 파라샤트 노악흐 그 이상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이번 주의 부분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처럼, 타락, 즉 인류가 온 세상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은 이 근본적 진리의 탁월한 예시입니다.


하쉠께선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세상을 파괴했습니다.


토라는 자유로운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유대 현인들은 그것이 우주를 지탱하는 ‘창조의 기둥’임을 강조합니다.

이번 파라샤는 ‘인간의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말 그대로 모든 창조의 ‘기초’, 또는 반대로 ‘붕괴’와 같은 광범위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운명이 하쉠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실수를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신’을 비난하거나 ‘운명’ 또는 ‘세상’을 비난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매우 편리한 믿음입니다.


만약 그들이 자신들의 모든 실패에 대해 그러한 말들을 하는 걸 선호한다면, ‘신성한 결정’에는 사람이 취하게 될 방향과, 그가 의롭거나 악할 것인지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많고 많은 요인들: 개인의 건강, 부, 생계, 개개별 삶의 대부분 요인들은 실로 신성한 결정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러나 진리는, 사람이 ‘좋을지’ ‘나쁠지’는 인간의 삶에서 하쉠께서 미리 이끌지 않는 유일한 요소라는 것입니다.


그 분은 사람이 가는 방향을 전적으로 사람에게 맡깁니다.

‘하늘에 대한 두려움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하늘의 손에 있다’라고 유대 현인들은 가르칩니다.

그렇기에 ‘하쉠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보라, 그것이 매우 좋았다’라고 한 것이 어떻게 그토록 부패하여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가?’라는 우리의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보세요, 그건 인간의 선택의 결과였습니다’입니다.


그 분께서 ‘보라, 그것이 매우 좋았다’라고 선언했을 때, 이것이 바로 하쉠의 계획으로, 자신의 자유 의지를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자체를 하쉠께서 매우 훌륭하다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핵심입니다.


인간은 자신보다 하쉠을 높일 것인지, 아니면 그 분께 반항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쉠께선 사람이 ‘좋은 길’을 원하는 경우 현명하게 선택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쉠께선 이 결과를 미리 알고 계셨을까요? 그렇습니다.

그 분이 놀랐을까요? 아닙니다.

사람의 선택을 간섭했나요? 아닙니다.

그 분이 (그 선택에) 실망했나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각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에 대해 당신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정신 나간 세상에서 한 사람이 어떤 차이를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온 세상이 멸망되기에 합당했지만, 노악흐는 ‘의로운 자요 그 세대에서 완전한 자’였습니다.


노악흐는 하쉠과 ‘함께’ 걸으며 하쉠의 눈에 은혜를 입었습니다. 한 사람이 세상을 구했습니다! 그의 행위 덕에 지면의 모든 생명체는 두 번째 기회를 얻었습니다. 단 한 사람으로부터 말입니다.


우리는 미슐레이(잠언)10:25에서 ‘의인이 세상의 기초’라고 배웠습니다.

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도 의로운 한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지탱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행동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넘쳐나는 타락한 세상에서 내가 무슨 차이를 만들 수 있겠는가?’

우리는 노악흐로부터 개인의 힘과 책임을 배웁니다. 노악흐는 오늘날의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니 인생 그 어느 때보다 깊이 마음을 열어보세요.

그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요? 옳은 것을 옹호하고 악한 시대에 의롭게 되기 위해 ‘초인’이 필요한 걸까요?


노악흐는 구절에서 말하길 ‘의로운 자’였습니다.

6:4에서 지난 번 파라샤의 결론에서 언급된 ‘타락한 엘로힘의 아들들’에 대한 한 가지 이해로는, 그들이 부와 권력의 영역에서 태어나서 ‘법 위의’자신을 보고 자란 엘리트 지배 계급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신의 아들’이라고 부르며 스스로를 초인들로 여겼고, 스스로를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건 무엇이든 가져갔습니다.

그들은 오만함과 남에 대한 착취로 결국 세상의 기초를 무너뜨린 퇴폐적이고 타락한 세대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과 대조적으로 노악흐는 자신이 ‘사람’일 뿐 그 이상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사람이 살아야 하는 바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규직’과도 같은 것입니다.


‘노악흐는 의로운 자였다’

그는 사회 유지에 필요한 규칙들에 따라 살았고, 인간성의 개선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노악흐’라는 단어는 잠시 유예 시키는 ‘휴식’의 개념을 전합니다.

베레쉬트 5장 말미에 노악흐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 레멕흐(라멕)가 그의 이름을 ‘이가 하쉠께서 저주하신 땅에서 우리 일과 우리 손의 수고로부터 우리를 위로할 것이다’라는 의미로 짓습니다.


유대 현인들은 노악흐가 태어나기 전엔 사람들이 밀을 뿌려도 아담의 저주로 인해 가시덤불과 엉겅퀴만 나왔다고 가르칩니다.

땅 자체가 노악흐의 탄생을 기뻐하는 듯 했고, 땅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쟁기 등의 농기구가 없었는데, 노악흐가 그것들을 발명 했습니다.

그는 토양을 경작하고 농사를 짓기 위한 농기구들을 최초로 고안해 냈고, 이것이 바로 그를 당대에 완벽한 의인으로 만든 것입니다.


‘세상의 상태에 관심을 갖고 동료 인간들을 도우려고 애쓰며, 참된 신이 인간을 위해 만든 모든 규칙과 경계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규제를 받아들이는 평범한 인간’,

이러한 인식, 겸허, 겸손함이 그를 의인으로 그 시대에 ‘완전하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라브 하임 리치만 Rabbi Chaim Richman

번역: 아담 리 (유대교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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