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샤트 렉흐 렉하 5783

샬롬,

지난 주의 파라샤트 ‘노악흐(노아)’는 하쉠의 실망과 지면의 모든 생명체에 대한 그 분의 재건을 위한 파괴로 시작되었었지만, 대홍수와 자비로우신 하쉠의 세상에 대한 치유 이후에도 토라는 회개하지 않는 인류의 암울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우상 숭배를 하는 신앙이 온 세상에 퍼졌고,정치적으로 노역을 하게 만든 바벨탑을 본부로 둔 자칭 ‘세상의 왕’인 니므로드(니므롯)가 범세계적인 노력으로 하쉠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일어납니다.


그는 이름 자체부터 ‘반역’을 의미하는 강력한 선동가였으며, 그의 목표는 하쉠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이 세상에서 그를 추방하는 것이었습니다.

진실을 위해 싸울 사람은 이미 아무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창조주께서 그런 이가 발견되길 원하셨다지만 창조주를 찾는 데 관심을 가질 사람이 있었을까요?

그것은 쉬르 하쉬림(아가서) 2:9의 ‘보라, (그가)우리 벽 뒤에 서서 창문들을 통하여 내다보며, 창살들을 통해 기웃거리는구나’라는 이미지를 연상시킵니다.


그렇지만 사람을 돌보시는 한 분의 창조주를 믿는 것엔 문제가 있는 듯 했습니다. 인류의 모토는 ‘이제 가자, 여기서 볼 것도 없다’였습니다.


사실, 인간은 그의 모든 허영심 안에 신성한 존재를 숨기고자 고안된 정교한 연막을 쳐 놨는데, 그럼에도 누군가 그것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바로 하쉠께서 예샤야후(이사야) 41:8을 통해 ‘내 사랑하는 아브라함’이라 부르신, 유대인들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그런데 이 얼마나 특이한 표현인가요?

성경 전체에서 하쉠께선 다른 의로운 개인에 대해 이 설명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내 사랑하는 아브라함’, 이 사람은 누구이며 이 사랑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요?


그의 이름은 노악흐에서 아브라함까지 10대의 족보와 함께 파라샤트 노악흐의 마지막 부분에서 처음 언급되는데, 기록 토라 자체는 아브라함의 배경과 초기에 대해 과묵한 한편, 미드라쉬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는 지식은 겉으로 보면 ‘아무 데나’ 뛰어든 것 같이 보이는 이 놀라운 남자의 뒷이야기를 채워줍니다.


아브라함은 대홍수를 통한 하쉠의 징벌과, 탑을 세운 자들의 흩어짐이 있었던 ‘가장 깊은 불신’에 빠져 있는 세상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우상이 터무니없는 것임을 개인적으로 인정했으면서도, 냉소적이게도 ‘생계를 위해’ 우상을 팔았습니다.


우리는 미드라쉬를 통해 아브라함이 젊었을 때 세상을 휩쓴 모든 형태의 우상 숭배에 대항해 반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족에 대항해 아버지의 우상을 파괴했고, 그의 믿음 때문에 통치 하는 이들과 충돌해 왔습니다.


‘그의 믿음 때문에’ 그는 니므로드 왕에 의해서 사형 선고를 받아 불타는 풀무불에 던져졌고, 기적적으로 그 풀무불로부터 상처 없이 구함 받았으며, 이 모든 것과 그에 더한 것들은 지난 번 파라샤트 노악흐의 끝 부분인 11장에 우리가 아브라함의 형제 하란이 우르 카쓰딤이라는 곳에서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리고 그 후에 ‘테락흐(데라)가 그의 아들 아브람과...로트를 데려갔다.’라고 언급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르 카쓰딤, 문자 그대로 ‘카쓰딤의 불’이라는 곳은 니므로드의 불타는 용광로에 대한 가려진의미입니다.

미드라쉬는 아브람의 재판 중에서 니므로드 왕이 또한 아브람의 형제 하란에게 그가 ‘신에 대한 믿음에 관해 어느 편에 서 있는지’를 질문했고, 하란은 아브람의 재판 결과가 나올 때까지 그의 결정을 보류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가 아브람이 불로부터 안전하게 나오는 것을 볼 때, 하란도 아브람의 신에게 충성을 선언했는데, 그의 결정이 순전하지 못했던 것으로 인해 그는 풀무불의 불길에서 사그라졌습니다.


‘진짜’가 아니라면 헤아림 받지 않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아브라함을 처음 만난 건 이번 주 파라샤의 12:1 첫 구절입니다. 하쉠께선 여기서 이미 그를 선택하셨고, 그에게 말씀하셨으며, 그를 축복하실 땅으로 가라고 지시하고 계시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그들의 첫 만남이지만 이것은 분명히 첫 만남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말을 건 자의 신원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그 분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르 카쓰딤에서의 에피소드는 아브라함의 배경 이야기 중 일부일 뿐인데, 이 놀라운 만남으로 이어진 사건 중 단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가 어디로부터 왔는지와 이것이 정말로 의미하는 바는, 그가 어떻게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었는지를 의미합니다.

예샤야후 41:2에서 예샤야후 예언자는 아브라함에 대해 얘기하면서 같은 질문을 의심스럽게 던집니다:

‘누가 동쪽으로부터 일으켜 그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의로움이 일어나게 하였느냐?’


아브라함은 세상에 창조주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정한, 첫 번째 ‘신자’였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초기에는 진리를 찾으려고 노력하면서 큰 고통을 겪어왔습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강렬한 열망과 함께, 세상을 꿰뚫는 통찰을 통해 그는 궁극적으로 하쉠께서 계신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선생이나 조력자 없이 혼자서 해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 영적 성장 과정과 관련해, 미드라쉬는 아브라함이 세상을 바라보며 ‘어째서 아무도 여기서 책임을 지는 이가 없는가?, 이 집(세상)의 주인은 누구인가?’라고 말했음을 기록합니다.


거룩하고 복되신 분께서 그 분께서 나타나 ‘내가 세상의 주인이다’라고 하실 때, 아브라함은 세상을 깊이 묵상함으로 스스로 하쉠의 임재를 인식할 수 있었고, 만물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주관하시는 신은 한 분이며,그 외에는 아무도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자, 마음을 한 번 열어보세요.

아브라함은 진리에 대한 열망과 그의 강한 성실함의 결과로서 계시를 경험했습니다.

그는 창조주가 있다는 것을 이해했으나,그는 혼자서 감내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히브리어로 아브라함 하이브리(אברהם העברי)라고 불렸는데, 이는 그가 온 세상에 대항해 한 쪽에 선 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남자가 어떻게 가장 순수한 믿음에 힘입은 용기와 결단력으로, 자신이 아는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 하는 도전에 직면했는지를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니므로드의 풀무불에 던져졌다는 이야기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우리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위협과 공포를 통제하는 자, 어둠과 두려움으로 다른 이들을 지배하는 자들에게 맞서고자 이 세상에서 치러야 할 대가를 이보다 더 강력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러한 권력들 앞에서 겁먹지 않았고, 연약함과 두려움으로 굴복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친절의 렌즈’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는 창조물들이 존재하게 된 ‘신성한 사랑과 친절’을 깨달았고, 이것이 바로 그가 창조주를 인식하게끔 이끌었습니다.

그는 창조주의 ‘좋으심’이 세상에 비치고 있음을 깨닫고, 그렇기에 창조주를 닮고자 일생동안 ‘친절’이라는 속성을 열렬하게 고수합니다.

이것이 유대 조상 아브라함이 ‘친절’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된 이유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그가 하쉠을 섬기는 주된 방법이었고, 그가 하쉠을 발견한 것이 ‘친절’을 통해서였기 때문에 친절은 그가 다른 사람들을 하쉠께로 인도하는 주된 방법이 됐습니다.


그러니 이제 가장 깊은 방법으로 마음을 열어보세요.

여기에 예샤야후서의 ‘내 사랑하는 아브라함’이란 남다른 표현에 대한 비밀이 있습니다.


하쉠께서 다른 사람에게는 발견하지 못한 이 지위에 정확히 무엇이 그가 ‘합당하다’고 하신 걸까요?


예언자 옉헤즈켈(에스겔)은 아브라함이 ‘하나였다’고 말하는데, 그와 같은 사람이 온 세상에 없었기 때문에, 바로 아브라함이 스스로 진리를 드러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들의 교육, 그리고 축적된 지식과 경험의 ‘총합’으로 따지지만, 아브라함은 아닙니다. 그는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보상을 약속하지 않았고, 처벌을 위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외부 요인에 의해 동기부여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 하쉠을 사랑했는데, 그 사랑은 어떤 다른 조건부적 관심이나 동기부여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겐 ‘선생’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직관력을 통해 어떤 계명이 주어지기도 전에 진리를 밝히고, 오직 하쉠을 위해 스스로를 지켰습니다.

따라서 람밤(마이모니데스)은 아브라함이 오직 사랑으로 동기를 부여 받아 하쉠을 섬기는 것이 의미하는 바의 ‘탁월한 모범’이라고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은 진리에 매달리는 것 외에는 다른 동기를 갖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스스로 하쉠을 발견한 방법에 대해 유대 현인들의 가르침이 그토록 많이 나온다는 것은 놀라운 게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하쉠께서 그를 ‘내 사랑’이라고 그를 부르신 이유입니다.


세상에 맞서 홀로 한 쪽에 서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세요.

그것은 주변 환경과 사회, 친구, 가족에게 휘둘리지 않는 힘, 그리고 모든 거짓을 고수하는 이들에게 당당하게 반대하고자, 즉 모두에게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을 사랑으로 해냈습니다.

얼굴을 들고 온 세상을 봐야 하는 것도 그에게 방해되지 않았고, 그는 사랑과 친절로 모든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근데 잠시만요, 분명 그 전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요?


의로운 노악흐와 쉠, 그리고 에베르, 우리는 이렇게 아브라함 이전에도 세상에 의로운 이들인 짜디킴(의인들)이 있었다는 것을 압니다. 그는 역사상 최초의 ‘하쉠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였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브라함’과 같은 표현으로 토라는 분명 아브라함의 특이점을 증언했습니다.


자 이제 그 어느 때보다 더 깊이 마음을 열어보세요.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있어 하쉠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하쉠을 ‘자기 자신에게만’ 두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다른 이들을 가르쳐야 하고, 새로운 세대를 키우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이해한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만 그런 것이 아니고, 12:5에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가 ‘하란에서 만든 영혼’들을 데리고 크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났다고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는 그들이 하쉠에게 데려온 사람들입니다.

이 구절은 문자 그대로 이러한 개개인을 창조한 아브함과 싸라이를 인정해 줍니다.


다음 주 파라샤트인 바예라 18장에선 하쉠께서 ‘이제 아브라함이 크고 강한 나라가 되어 땅의 모든 나라들이 그로 인해 축복을 받을 것이니...내가 행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그를 알았으니 이는 그가 그 후에 그의 아들들과 그의 집에 의와 법도를 행함으로 하쉠의 길을 지키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백성과 가족을 양육하고 사회의 변화를 주도하며 하쉠의 이름을 이 세상에 널리 알리 홍보하기 위해 그것을 ‘전달’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는 점에서 독특한 자였습니다.

그렇기에 12장은 그가 ‘하쉠의 이름을 부르며 남쪽을 향해 계속 이동했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온 세상을 위해 이 길을 개척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쉠을 사랑하는 것은 그 분을 사랑하는 것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 분을 사랑하게 만들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걸 의미했습니다.

하쉠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다른 사람들이 사랑하기를 원하도록 동기를 부여해 줍니다.


어떤 사람이 하쉠을 사랑하면서 ‘나는 하쉠과 잘 어울리고 착한 일을 많이 한다’라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이들이 배워야 할 동기부여가 되지 못하고 하쉠에게 매달려야 할 동기부여가 되어주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하쉠을 알지 못하는 고통에 가슴이 타오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쉠에 대한 그의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것을 자신에게만 두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그 사랑을 경험하길 바라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믿음과 사랑, 하쉠에 대한 지식을 가르쳐 준 아브라함의 길을 걷고, 그렇게 살기에 합당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는 하쉠께로 가는 길의 뿌리이며, 진정으로 하쉠께로 향하는 자가 그의 자손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모든 시대를 통틀어 모든 개종자와 하쉠을 사랑하는 모든 영적 구도자의 아버지입니다.


하쉠께서는 그들이 모두 ‘내 사랑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라브 하임 리치만 Rabbi Chaim Richman

번역: 아담 리 (유대교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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