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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샤트 키 티싸 5783 '너의 빛을 비추라'


샬롬, 이번 주 파라샤인 키 티싸의 중심 사건 중 하나는 금송아지를 뜻하는 ‘에겔 하자하브’의 심각하고 악명 높은 죄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실패의 순수한 범위는 마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너무 초현실적이고 불가능하기까지 해 보이죠.


시나이 산 기슭에 서 있는 동안 전능자의 입으로부터 토라를 받은 지 40일 만에 백성들이 우상 숭배에 굴복할 정도로 낮아질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모셰는 언약의 돌판들을 받고 내려오기 시작했지만 우리는 슈모트(출애굽기/탈출기) 32장이 열리면서 사람들은 모셰가 산을 내려오는 것이 지체되는 것을 보았다는 걸 듣습니다.

그런데 그 지체는 그들의 인식에만 있었으며, 단순한 계산 착오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저 특정 시간까지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고 그들은 그것을 잘못 계산한 것이었죠.

그런데 마음을 열어본다면, 진실은 그 사람들이 너무 모셰에게 의존함으로써 그가 없는 동안 그들이 공포에 휩싸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가 없이 무력감을 느낀 것이었습니다.

모셰는 하쉠 자신의 증거에 따르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이자 모든 인간 중 가장 겸손한 자였지만, 어떤 의미에선 그에 대한 사람들의 애착은 건강하지만은 못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미쯔라임(이집트) 땅으로부터 우리를 올라오게 한 사람 모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가 모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근데 잠시만요, ‘미쯔라임 땅으로부터 우리를 올라오게 한 사람 모셰’? 그들을 그곳으로부터 인도해 낸 것은 모셰가 아니라 하쉠 자신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그 사실을 내면화하지 못한 것입니다. 모셰는 그저 하쉠의 대리인이었죠.

그들은 아직 하쉠과의 관계를 발전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하쉠에 대한 모든 경험은 모셰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의 실수는 모셰를 ‘하쉠께서 선택한 도구’가 아닌 ‘신처럼 된 인간’으로 그를 본 데에 있습니다.

그들은 그만이 유일하게 하쉠과 연결되었던 자라 생각했었기 때문에 그가 없다는 것이 그들에게 연약함을 느끼게 만들었죠.


이제 혼합된 군중 속에서 부정적인 요소들에 의해 선동된 이스라엘 사람들은 형태의 오류에게 희생됩니다.

그들은 아하론(아론)이 그들을 집결시킬, 집중시킬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 주길 원했습니다.

하쉠과 함께 방에 있는다는 것을 그들은 두려워했고, 그들은 아직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실제로 하쉠과 단 둘이 있습니다. 그건 좋은 일이지 당황할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그분의 보이지 않는 존재는 모든 수준의 창조물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개념은 너무 이해하기 어렵고, 매일 그것을 따라가고 그것에 따라 우리의 삶을 살아가길 위해 그것을 내면화 시키고 올바로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데 평생이 걸리죠.

그러나 우리가 부분적으로나 가끔이라도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단 한번이라도 진정으로 엿볼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순간적으로 삶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수준의 지식으로 우리를 인도해 줍니다.


우리는 지난 주의 파라샤트 테짜베에서 이 온 세상이 어떻게 하쉠의 ‘변장’인 것인지에 대해 나눠봤는데, 이번 주에 유대인들은 많은 이들이 의복을 입어 변장하는 푸림(부림절)을 기념했습니다.

에쓰테르(에스더) 두루마리에서는 하쉠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는데, 그분께서는 기적적으로 자기의 백성을 인도하셨죠.


이제 푸림은 끝나고, 유대인 모두는 변장을 벗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깊게 마음을 열어보세요. 이번 주 파라샤트 키 티싸에서 누군가는 먼저 마스크를 썼고 그대로 거의 항상 착용하고 있습니다.


모셰의 중보 기도, 그의 백성을 위한 그의 기도는 첫 번째 욤 키푸르(대속죄일)에서 금송아지의 실수에 대한 민족의 용서를 보장받는데에 있었고, 그것을 이루어 냈습니다.

하쉠께서 그분의 백성과 언약을 갱신하신 것입니다.


금송아지 사건 이후, 모셰는 시나이 산에서 밤낮으로 40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머무르며 하쉠의 명령에 따른 두 번째 판에 언약의 말씀인 열 가지의 말들(십계명)을 기록하는데, 우리는 마지막 부분인 34:29부터 가장 놀라운 내용을 읽게 됩니다:


‘모셰가 씨나이 산으로부터 내려올 때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 모셰의 손에 증거판 2개가 있었다. 모셰는 그가 그와 함께 말씀하셨을 때 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아하론과 모든 이쓰라엘 아들들이 모셰를 보니, 보라,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났고 그들은 그에게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했다. 모셰가 그들을 불러서 아하론과 회중의 모든 지도자들이 그에게 돌아왔다. 모셰가 그들에게 말했다. 그런 후에 모든 이쓰라엘 아들들이 다가가니 그는 하쉠께서 씨나이 산에서 그와 말씀하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명령했다. 모셰가 그들과 말하기를 마치고 그의 얼굴 위에 베일을 덮었다. 모셰가 하쉠 앞에 들어와서 그와 함께 말할 때는 그가 나갈 때까지 베일을 벗었다. 그리고 그는 나가서 이쓰라엘 아들들에게 그가 명령받은 것을 말했다. 이쓰라엘 아들들이 모셰의 얼굴을 보니 모셰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났다. 모셰는 그와 함께 말하러 들어올 때까지 그의 얼굴 위에 베일을 다시 덮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번 파라샤가 끝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 자손은 모셰를 바라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쉠과 대화하기 위해 하쉠의 임재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가면을 벗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사람들이 모셰에게 다가가 하쉠의 계명을 배우려고 할 때마다, 그들에게 토라를 가르칠 때 모셰는 가면을 벗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르치는 일을 마친 후 여전히 백성들 사이에 있을 때면 그는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볼 수 없도록 가면을 씁니다.

그 빛은 그가 죽는 날까지 모셰의 얼굴에 남아 있었으며, 드바림(신명기) 34장에서 그의 삶의 끝과 관련해 우리가 읽는 말씀의 비밀이었습니다.

‘그의 눈이 흐리지 않았고 그의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 이었습니다.


그런데 토라는 여기서 모셰의 거룩함과 높은 영적 수준이 그의 얼굴에 명백히 보였다는 매우 특이한 현상을 묘사합니다.

코헬레트(전도서) 8:1은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을 빛나게 하며’라면서 지혜를 얼굴에서 볼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모셰의 그 빛은 다릅니다. 완전히 달랐죠. 왜냐하면 사람의 지혜가 얼굴을 빛나게 한다는 것은 비유적인 것이었지만 그에 대한 것은 비유가 아니었습니다.

이번 파라샤의 구절은 모셰의 피부가 빛났다는 것과, 그것이 문자 그대로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에 대해 물리적인 부분에서 그 실제적 표현을 설명합니다.

‘아하론과 모든 이쓰라엘 아들들이 모셰를 보니, 보라, 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났고 그들은 그에게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했다.’


그럼 이 빛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요?

어떤 이들은 그것을 빛나는 하늘처럼 그의 얼굴에서 빛나는 슉히나(하쉠의 임재)의 영광인 카보드(영광)의 현현으로 이해했지만, 거룩한 오르 학하임과 같은 일부 유대 현인들은 아담이 에덴으로부터 추방되었을 때인 베레쉬트(창세기)에서 다시 찾은 구절과 이 의견을 연결합니다.

베레쉬트 3:21은 ‘하쉠 엘로킴께서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들을 만드셔서 그들에게 입히셨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피부/가죽에 대한 히브리어는 오르(עור)라고 하며, 그 글자는 아인(ע)으로 시작합니다.

그것은 ‘빛’을 의미하는 알레프(א)로 시작하는 오르(אור)와 같은 소리로 들리죠.


토라 현인인 라브(랍비) 메이르는 그의 두루마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 구절은 알레프와 함께 기록되었다. 즉, 하쉠께선 그들에게 빛의 옷을 만들어 주신 것이다.’

그런데 물론 토라의 진정한 버전은 단 하나뿐입니다! 라브 메이르는 절대 다른 철자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가르침은 문자 그대로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라 유대 현인들의 다른 많은 가르침처럼 시적인 장치이자 은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표현된 개념은 라브 메이르가 너무 거룩했음으로 그의 존재, 그의 인격, 그의 삶이 어떻게 ‘피부의 옷’에서 ‘빛의 옷’으로 바뀔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예시였습니다.

오르 학하임은 오늘날에도 자신을 정화하고 높은 영적 수준에 도달한 사람은 ‘피부’를 ‘빛’으로 바꿀 수 있다고 썼습니다.

우리는 ‘하쉠의 형태’ 그 안에서 창조되었고, 거룩하고 복되신 분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몸은 피부(가죽)로 덮여 있으나 자신을 정화하는 자는 쩰렘 엘로킴(하쉠의 형태)의 빛이 피부를 뚫고 나옵니다.

그의 오르(אור)가 오르(עור)를 뚫고 빛나는 것입니다.


그럼 모셰는 왜 금송아지의 죄에 대해 이스라엘을 대신해 간구하고 두 번째 석판들을 받으러 올라간 후에야 그 광채를 받을 자격을 지닌 걸까요?

첫 번째 때는 왜 그의 얼굴이 빛나지 않았을까요?


그건 분명 32:32에서 표현한 것처럼 그가 보여준 비할 데 없는 헌신과 그의 백성에 대한 그의 헌신, 그리고 자신을 조금도 고려치 않고 그들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려 한 것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지금 당신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면, 그리고 혹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면 부디 당신께서 기록하신 당신 책으로부터 저를 지워내 주십시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아이러니하게 모셰가 그토록 무조건 적으로 사랑했던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그를 바라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 사이의 영적 ‘간격’은 이제 너무 넓어진 것입니다.

그와 그들의 관계는 결코 이전 같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잘못 판단해서 그를 ‘대신할’ 자를 찾은 게 아니라 그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했습니다.


모셰는 하쉠의 임재 안에서 가면을 벗고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천사보다 높아진 것입니다.

예샤야후(이사야) 6:2은 하쉠의 임재 안에서 섬기는 수종드는 천사들에 관해 ‘쓰라프들이 그를 위로 모시고 섰는데 각각 여섯 날개들이 있어 둘로는 그의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그의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고 있었다.’라고 전하는데, 이렇게 그분 앞에 있는 천사들도 얼굴을 가려야 했지만 모셰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번 주의 토라 부분과 저번에 축하했던 푸림의 합일점에 관해 생각해 보세요.

모두가 알다시피 푸림에는 가면을 쓰죠. 이는 푸림의 이야기에서 하쉠께서 숨겨져 있고, 그분의 이름이 에쓰테르 두루마리에서 언급되지 않다는 개념을 반영합니다.

그리고 사물이 이 세상에 나타나는 방식이 꼭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개념을 전해주죠.


하만은 정상에 올랐고 유대인들은 망했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모든 것이 뒤집어졌죠. 누가 먼저였나요?

진리는 항상 감춰져 있지만, 푸림에 우리는 그 감춰진 가운데서도 하쉠의 무한한 사랑에 대한 거룩한 계시를 받습니다.


가면에 사용할 수 있는 여러 히브리어 단어가 있는데, 우리는 34:33의 부분에서 모셰가 그의 얼굴에 베일, ‘마쓰베’를 썼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위장/변장’을 뜻하는 히브리어 ‘하쓰바아’와 관련이 있는데, 이 단어는 실제로 외형, 모양, 또는 표현 방식에 대한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그건 ‘숨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전형적으로는 무언가의 진정한 본질을 숨기는 개념을 전달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제 놀랍게도 ‘가면’이란 의미에 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단어 ‘마쎅하’가 금송아지에 대한 이번 주 토라 파라샤에서 나오게 됩니다. 여기서 마음을 열어보세요.


32:4에서 금송아지에 대해 ‘에겔 마쎅하’라고 쓰여 있는데,이는 ‘(부어 만들어) 녹인 송아지’로 번역됩니다.

하쉠께서 자비의 13가지 속성을 계시하여 주신 후,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해달라는 모셰의 요청을 묵인하시고 34:17에서‘너는 융해한 신상들을 너를 위하여 만들지 말아야 한다’라고 반복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너를 위하여 가면(마쎅하)의 신을 만들지 말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금송아지와 관련하여 마쎅하라는 단어가 ‘융해하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니면 금송아지는 가면의 일종이었던 걸까요?


마쎅하(מסכה)라는 단어는 마싹흐(מסך)와 관련이 있고, 그것은 ‘덮개’, 또는 ‘덮다’, ‘구분선을 두다’ 등을 의미합니다.

마스크는 그렇게 착용자를 ‘덮어’ 다른 모든 이들과 분리하죠.

이것이 바로 슈모트 36:37에서 ‘그는 장막 입구를 위하여...가림막을 만들었다’로 그 단어가 사용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예샤야후 22:8에서는 ‘그가 예후다의 덮개를 벗겼다’로 나타나고, 같은 책 25:7에서 마쎅하는 ‘모든 백성들을 가리는 가리개’로 사용되었습니다.

‘가면’인 마쎅하에서 ‘녹여 만든 신’인 엘로헤이 마쎅헤이로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요?


사실 마쎅하의 어근 중 싸멕흐(ס), 하프(כ)라는 두 글자는 싹흐(סך), (액체 등을) ‘붓다’와 관련이 있는데, 그렇게 형성되고 녹아 그것으로부터 ‘융해된 신’인 슈모트 32:4의 ‘녹인 송아지’가 됩니다.

‘그들을 위하여 부어 만든 상을 만들었다’라고 한 드바림 9:12, 그리고 ‘부어 만든 우상을 보고 “너희가 우리의 신들이다”라고 말하는 자들’이라고 한 예샤야후 42:17처럼, 마쎅하는 ‘가면’과 동시에 ‘융해’를 의미합니다.


분명 우리는 우리를 하쉠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분리의 거짓 신’이라 부를 수 있는 녹인 송아지로부터 그 두 가지의 가능한 번역이 함께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면처럼 우리에게서 하쉠을 숨기거나 아니면 우리가 하쉠으로부터 가면을 쓰는 것일 수도 있죠.


그런데 모셰의 가면과 관련해 사용된 단어는 마쓰베, ‘위장’입니다.

위장은 그것을 사용하면 ‘현재 위치’에 있지만 ‘보이지 않는 상태’로 유지됩니다.

그것이 모셰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입었던 옷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스크는 분리를 시키죠.


모셰는 자신을 구분 시키는 가면을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백성과 함께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이 될 수 있게 해주는 위장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분리시키지 않고 조화를 이루었고, 다른모든 이들을 편안하게 유지하기 위해 위장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쉠과 대면하여 말한 유일한 사람인 모셰에게 비친 빛을 이해합니다.

람밤이 ‘난처한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에서 썼듯이, 모셰가 그런 수준으로 올라간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와 하쉠 사이에는 장벽이 없었고, 그의 영혼의 진정한 모습이 그를 통해 빛났으며, 그것은 그의 얼굴에서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이었습니다.


유대 현인들은 모든 사람이 신성한 영을 가지고 있고 모든 사람이 하쉠의 형태로 창조되었지만, 대부분 스스로 부과한 장벽에 가로막혀 방해를 받는다고 해도 모든 이들이 그것을 달성할 수 있음을 분명히 전합니다.

예를 들어, 참된 회개에 합당한 자, 진심으로 하쉠께로 돌아오는 자인 츄바(회개)를 한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빛에 대해 유대 현인들이 논의한 기록 상의 예로 현인들은 어려운 시험을 성공적으로 이겨낸 순전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간음의 죄를 범할 기회를 주어 시험을 받았으나 자기의 성향을 다스려 굴복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그의 얼굴이 모셰처럼 빛난 것입니다.

그는 하쉠과의 친밀함을 추구하고 지속적으로 자신의 악한 성향을 제어시키는 데 성공한, 육체적인 어려운 시험을 견디고 자신의 육체를 제어해 그 장벽을 무너뜨린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육체의 본성을 이기는 자는 그 빛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성실한 자라면 누구나 달성할 수 있는 그런 통달은 한 개인의 영혼의 빛을 ‘빛의 옷’을 통해 빛나게 해줍니다.

그래서 예샤아후 예언자는 58장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러면 네 빛이 새벽처럼 터져 나와 네 회복이 빨라질 것이다’


라브 하임 리치만 Rabbi Chaim Richman

번역: 아담 리 (유대교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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