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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s pictureAdam Lee

파랴사트 에모르 5783 '우리 생애의 날들'

샬롬, 이번 주 파라샤인 에모르의 부분에서 발견되는 ‘많은 개념들 사이를 연결해 주는 근본적인 주제’ 중 하나는 우리 모두가 일상 생활에서 직면하는 가장 큰 도전 과제 중 하나와 관련을 가집니다.

바로 이 ‘환상’의 세계에 살아가면서 하쉠께 계속 집중하는 방법입니다.


우리의 유한한 세계가 시공간을 통해 소용돌이치는 동안 우리는 어떻게 사람으로써 하쉠과 긴밀한 연결을 유지해야 할까요?

이번 주 파라샤는 이렇게 ‘현실 인식’에 대한 것을 가르쳐줍니다.

시간을 포함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엔 ‘하나의 근원, 하나의 뿌리’인 하쉠 자신이 있습니다.

그 근원으로부터 모든 것은 하나이며, 공간과 시간과 삶의 차원이 교차하고 함께 모이는 것이죠.


바이크라(레위기) 21장부터 시작되는 파라샤트 에모르에서 우리는 파라샤트 케도쉼에서 배웠던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거룩함의 일반적 규칙’인 아하론(아론)의 자손들, ‘코하님’에 대한 규칙으로 되돌아갑니다.


토라는 거룩한 성전에서 신성한 섬김에 참여함으로 이 세상에 신성한 임재인 슉히나를 불러오는 제사장들에게 자신을 전달합니다.

그들은 토라가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죽음의 환상’으로 드러나는 것과 거리를 두도록 명령 받습니다. 인간의 필수적인 부분이나 그럼에도 여전히 ‘거짓’인 그것을 말이지요.

그들은 균형을 잃지 않아야 하기에 그것을 무시하도록 지시 받습니다.

그들(제사장들)에게 그 잘못된 환상은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22장의 끝에서 이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내 계명들을 지켜야 하고 너희는 그것들을 행해야 한다. 나는 하쉠이다. 너희는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말아서 내가 이쓰라엘 아들들 안에서 거룩하게 여겨져야 한다.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하쉠이다. 너희에게 엘로킴이 되려고 너희를 미쯔라임 땅에서 나오게 했다. 나는 하쉠이다.’


인간 상태의 평범함과 허황으로 정신이 마비될 때, 정신은 공포의 노예가 되어 그것에 예속됩니다.

그것이 바로 이집트 유배 생활의 전부였으며, 그것이 하쉠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선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고 너희를 위하여 엘로킴이 되려고 너희를 미쯔라임으로부터 인도해 낸 하쉠이다’라는 구절을 통해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십니다.

그 ‘노예화’는 하루가 단순히 다음날로 이어지고 매일 똑같고 변화의 기회가 없으며,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고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할 때 당연히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장 깊은 유배로, 사람이 이 세상, 이 삶에서 구원과 함께 더 높은 목적을 지닌 거룩함으로 물들여질 수 없다고 확신하게 합니다.


그러니 여기서 마음을 열어보세요.

23장 전체는 ‘시간’을 거룩하게 하는 것에 관한 것으로, 우리 삶의 다른 어떤 측면보다도 사람을 가장 연약하고 무방비 상태로 만드는 건 ‘시간의 흐름’이며, 우리를 포로나 희생자처럼 갇힌 느낌으로 만드는 것 역시 시간의 흐름인데 그렇기에 이 장이 다음 구절로 시작하는 이유입니다:

‘이쓰라엘 아들들에게 말하라. 너희가 거룩한 모임들로 그들을 소집해야 할 하쉠의 축일들을 그들에게 너는 일러야 한다. 이것들이 내 축일들이다.’


모든 축일들을 준수할 것에 대한 신성한 계명은 이 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축일들을 ‘모아딤’이라고 불리며, 문자 그대로 ‘만남’을 의미합니다. 그 축제는 시간의 차원에서 인간과 하쉠의 만남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날들은 ‘미크라에이 코데쉬’라고도 불리는 거룩한 날들입니다. 이 말은 ‘그들이 거룩함을 외친다’로도 이해할 수 있는데, 한 해의 주기가 바뀌면서 각 주간의 안식일과 하쉠에 의해 지정된 시간의 지정된 절기는 그렇게 문자 그대로 거룩함을 외칩니다.

그렇게 성화된 시간의 요소를 통해 유대인들은 오늘날도 ‘안일함’이라는 죽음의 덫에 빠지지 않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이스라엘이 무의미한 시간이라는 심연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하는 것을 막고 우리의 삶에서 하쉠께 집중하도록 재조정 해줍니다.


그리고 바로 이 장에서 이스라엘은 또한 오메르를 세야 하는 것에 관한 단일 계명을 받는데, ‘오메르’라는 것은 측정의 단위로, 거룩한 성전의 시대에 니싼 월 16일 밤, 축제 첫날의 끝에서 추수되는 보릿단의 측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페싹흐(유월절) 이튿날 거룩한 성전에 흔드는 제물로 가져옵니다.


하쉠께선 페싹흐와 시나이 산에서 토라를 주시는 첫 열매의 기간인 ‘샤부오트’ 사이의 49일, 완전한 7주간을 표시하면서 이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에게 문자 그대로 ‘매일매일’ 세라고 명령하십니다.

지금 이 순간, 이스라엘은 매우 특별한 기간에 살고 있으며, 매일 밤 유대인들은 50일까지 남은 날과 주간을 세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계수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이 계명을 이해하는 데에는 여러 수준이 있는데, ‘교육의 책’으로 유명한 쎄페르 학히눅흐라는 고전 작품에 의해 제시된 간단한 이해로는 오메르 계수가 중요한 사건을 큰 열정으로 기대하는 사람과 같다는 ‘즐거운 기대의 표현’으로 얘기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떠난 날인 페싹흐 첫 날부터 시나이 산에서 토라를 받는 날까지를 계산하는 것입니다.


페싹흐에 이스라엘은 육체적으로 구원되었으나, 이집트를 탈출하는 것 자체가 여정의 끝은 아니었습니다.

자유는 단순히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닌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영적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라비 낙흐만은 오메르를 세는 것이 또한 사람이 ‘자신의 날이 세어져 있음’을 알아야 하며, 각 시간과 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계산해야 하는 바를 상기시켜 주는 것이라고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때론 무언가를 하고 싶고 심지어 중요한 것까지도 미뤄가며 해야 할 여러가지 이유를 찾기도 합니다.

‘내일은 시험이 있고, 오늘 밤은 약속이 있고...일이 너무 바빠서 놓칠 수 없는 게 있어’라며 매일 자신을 위한 변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번 일들을 밀어내기도 하죠.


그러나 오메르를 세는 것은 또한 자신의 날을 세는 것과 매일매일이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 하지 않은 일은 다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돌아오지 않으며, 내일은 새로운 도전과 목표가 있는 새로운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그분의 소리를 너희가 들어야 한다’라고 하는 트힐림(시편) 95편, 그리고 ‘내가 오늘 네게명령하는’이라고 하는 드바림(신명기) 6장을 비롯한 토라의 다른 많은 구절들, 그리고 ‘보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축복과 저주를 주니’라고 하는 드바림 11장 등 이 모든 구절들과 더 많은 구절들에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오늘’뿐임을 가르쳐줍니다.


오늘은 ‘행동’을 위한 날인 것입니다.

오늘은 동기부여와 변화를 위한 날이고 내일까지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더 깊이 열어보세요. 이 시간 계산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이 날들은 영적 과제에 대한 도전을 수반하기도 합니다.


유대 현인들은 이집트를 탈출하던 날 밤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하쉠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강력하고 신성한 빛을 비추셨다고 가르쳐줍니다.

이 강렬하고 거룩한 빛은 그들을 덮쳤는데, 그들을 들어 올려(일으켜 세워) 이집트로부터 탈출하도록 추진하고, 그날 밤에 구원의 길을 따라 그들의 길을 비추며, 현실의 고정된 경계를 밝히고 부수어 주고, 이스라엘 민족을 자유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하쉠께서는 페싹흐 첫날 밤 직후 이 신성한 빛을 거두셨습니다.

그 자리에 일종의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것은 그 빛의 ‘기억’이었습니다.

그것은 왜 철회되었던 걸까요?


이스라엘이 종살이 하던 곳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선 그런 엄청난 ‘가속’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육체적 자유를 얻었음에도 여전히 노예적 정신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음 속으로는 여전히 파르오의 종이었습니다.

그들의 서두름이 너무 급했고 빛은 너무 강렬해 사람들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었습니다.

이것은 이 구절에 의해 암시됩니다:

‘급히 그것을 먹어야 한다...그 백성이 아직 발효되지 않은 그의 반죽을 거둬 그들의 남은 것을 그들의 옷들에 싸서 그들의 어깨 위에 메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이 순간을 위해 그들을 준비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더 깊은 수준에서는, 그들은 아직 합당한 노력을 기울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에 빛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고 우리는 배우는데, 개별적인 영적 수준의 획득 없이는 어떤 영적 이득도 실제적이고 지속적일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노력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거기엔 ‘바로 가기’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바로 다음날에 빛이 떠나고 그들은 ‘높은 수준’으로부터 내려와 광야를 여행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천천히, 7주 후에 시나이 산에서 토라를 받을 준비를 함으로 그 빛을 되찾는 법을 배웁니다.


광야의 세대는 모든 시대를 위한 구원의 모형이었고, 그 같은 과정은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매년 ‘출애굽’의 밤인 페싹흐 첫날 밤에 이스라엘은 동일한 신성한 빛을 받습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빠르게 출발하죠.


유대 조상들이 그러했듯 그 빛이 남긴 자국은 다시 그 빛으로 채워지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되찾기 위해선 노력해야만 합니다.

그 빛은 우리가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어떠한 삶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전조와도 같은 신성한 영감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일하지 않은 것을 처리할 능력은 없어서, 오메르 시대의 근본적 영적 목표는 모든 개개인이 이 빛을 다시 받기 위해 ‘필요한 그릇’을 준비하도록 불러내게 합니다.


보세요, 개인적인 유배 상황에 놓여진 모든 이들인 우리 각자는 항상 이집트를 영원히 떠나고자 합니다.

그리고 때로 우리는 갑작스런 빛과 영감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떠날 것이고 우리는 자기 자신이란 장치에 맡겨지는데, 왜냐하면 진정으로 발전하기 위해서 아기가 첫 발걸음을 내딛을 준비가 되었을 때처럼 그는 천천히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스스로 익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부모가 그의 손을 잡고 그를 인도할 수도 있지만 결국 그가 스스로 걷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배우게 하려면 그의 손을 놓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또한 그가 ‘일어날 수 있게’ 그를 ‘넘어지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쉠께서도 ‘너를 위해서 할 수 없다’라고 말하십니다.

그분께선 그 사람이 기꺼이 움직일 것인지를 기다리십니다.


그분께선 우리가 스스로 선택을 하도록 허락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도권을 보여야 할 뿐만 아니라 기꺼이 책임을 지고 한 번에 한 걸음 씩 자신을 구속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메르를 세는 것과 관련된 이 영적 작업은 카발라의 개념으로도 알려진 ‘열 가지의 세피로트’로도 알려진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비록 이것은 진지한 공부가 필요한 주제이고 단순화 시킬 수 없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단히 말해보자면 토라적 지혜의 내적 차원은 ‘창조의 시작’이 창조주의 무한한 빛이 모든 존재를 가득 채웠음을 가르칩니다.


그분께선 세상을 창조하려 하셨을 때 큰 빛은 감추시고 세상을 창조하실 ‘공간’을 만드셨는데, 그 모든 현실은 우리가 ‘속성’이라 부르는 미도트로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열 가지의 세피로트라는 신성한 발산을 통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하쉠의 속성은 하쉠의 신성한 빛의 전체성과 총체적 통일성을 굴절시키는 프리즘과도 같습니다.

하쉠께선 이러한 속성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셨고, 베레쉬트(창세기) 미드라쉬에 나오는 ‘열 가지의 창조 선언’에 반영된 것처럼 계속해서 세상을 운영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모든 영적 과정은 이 열 가지의 발현을 통해 정제되고 굴절됩니다. 그것들은 현실의 모든 측면과 세부 사항들에서 나타나죠.


처음 세 개의 세피로트는 인간 지성의 기능과 유사하며, 이 기간(오메르 계수) 동안 이스라엘의 영적 작업은 인간의 감정적 특성과 유사한 나머지 일곱 가지 세피로트를 반영합니다.


우리의 매일의 임무는 우리의 감정적 특성을 적절하게 전달하고 활용하는 것을 목표로 새로운 조명을 위한 내부 용기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7개의 하위 세피로트와 관련된 것으로, 헤쎄드(친절), 그부라(힘), 티프에레트(조화), 네짝흐(승리), 호드(영화로움), 예쏘드(기초), 말후트(주권)이 그것들입니다.


그것은 매 주마다 다른 하쉠의 속성에 해당하며, 우리는 그것으로 매일 가르침을 받습니다. 하쉠께선 우리 모두에게 창조된 하쉠의 형태를 반영하는 적절한 균형을 잡게 하고자 우리의 감정을 바로잡고 연마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들을 보내주십니다.


우리 삶에서 이틀은 결코 똑같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매일매일은 새로운 빛을 비추는 새로운 선물입니다.

우리는 매일 각 속성의 다른 측면들, 하쉠께서 그날 그날 비추고 있는 특정한 발산으로 인해 시험을 받습니다.


이스라엘은 장애물을 극복하고 자기 자신을 바로잡는데 성공하면서 샤부오트(오순절) 축제인 50일 째에 토라를 새롭게 받는 데 필요한 영적 도구를 구축합니다.

거룩한 유대 현인들은 그 날이 일 년 전체’의 열쇠라고 가르칩니다.

오메르를 세는 이 날은 강력한 영적 성장을 위한 큰 잠재력을 갖고 있기에 이스라엘이 요즘 하고 있는 내면의 작업은 1년 전체의 분위기를 설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셈’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쓰피라(ספירה)는 ‘이야기’를 말하는 씨푸르(סיפור)와 ‘이야기 해주다’를 의미하는 싸페르(ספר)와 관련됩니다.

그것은 ‘책’이라는 쎄페르와도 같은 어근인데, 이렇게 요즘 이스라엘은 삶의 ‘이야기’만 말하는 것이 아닌 삶의 ‘책’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쓰피라는 귀중한 보석인 ‘사파이어’를 의미하는 싸피르와도 같은 어근이어서, 그렇게 자신의 책에 우리의 이야기를 세고 쓰고 하면서 우리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 한 번에 한 걸음 씩 전진하고자 노력하면서 매일을 사파이어처럼 빛나게 합니다.

사람으로서, 자녀로서, 그리고 창조주의 종으로서 말이죠.


라브 하임 리치만 Rabbi Chaim Richman

번역: 아담 리 (유대교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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