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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샤트 베샬락흐 5783

샬롬, 이번 주 토라 부분은 슈모트(출애굽기/탈출기) 13:17부터 시작하는 네 번째 파라샤인 파라샤트 베샬락흐입니다.

이번 파라샤는 자유를 향한 이스라엘의 초기 단계를 시작으로, 문자 그대로 하쉠의 영광스러운 주권과 그분의 섭리, 그리고 그분의 위대한 구원에 대한 기쁨과 놀라움으로 울려 퍼지는 절정으로 이릅니다.


모셰와 이스라엘 자손이 부른 장엄한 ‘바다의 노래’는 페싹흐(유월절) 일곱째 날에 온 민족이 기적적으로 마른 땅을 밟고 바다를 건너는 가운데, 예언적 환상으로 절정에 이르는 구원의 축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노래를 기리기 위한 이번 안식일의 특별한 이름으로 ‘노래의 안식일’이라는 의미의 샤바트 쉬라로 부릅니다.


바다가 갈라진 것은 이집트로부터 나오는 과정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기적적인 사건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이스라엘 역사와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적일 것입니다.

그것은 실제로 미드라쉬 탄후마가 가르치듯 ‘전세계’가 그 기적을 느꼈으며, 인정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다를 건너는 그 때에 온 세상의 모든 ‘모인 물들’도 갈라졌습니다.

물은 생명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물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영원한 생명’ 되시는 하쉠을 가리킵니다.

바다가 갈라지고 마른 땅의 길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열렸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엄청난 수준의 에무나, 즉 하쉠을 믿는 믿음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하쉠의 권능의 위대한 계시인 ‘크신 손’을 보았고, ‘내가 하쉠께 노래하리니 이는 그가 지극히 높으시기 때문이다’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겪었던 모든 속박과 고통, 모든 어둠과 압박이 모두 신성한 섭리에 의해서였음을 이해했습니다.

그것은 모두 하쉠의 계획의 일부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남녀노소에게 가장 깊은 감동을 안겨주는, 비할 데 없는 계시의 경험이었습니다.

하쉠의 절대 주권에 대한 인식은 너무도 강렬해서, 유대 현인들은 뱃속의 태아도 이 노래를 불렀음을 가르칩니다.

유대 현인들은 그 경험의 너무나 위대함으로 가장 신분이 미천한 자더라도 예언자 옉헤즈켈(에스겔)보다 바다에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큰 비전을 보았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경험일 뿐이었습니다.


이제 여기서 마음을 한 번 열어보세요.

이번 파라샤에서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 경이롭고 감동적인 사건이 있은 직후 토라는 믿음의 절정에 이르게 된 지 불과 3일 뒤에 사람들이 마실 물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마실 수 없던 쓴 물이 있는 곳에 이르러 모셰를 원망합니다.

우리는 15장 끝부분에서 다음의 내용을 읽습니다:

‘모셰가 쑤프 바다에서 이쓰라엘을 이끌어 슈르 광야로 나가 그 광야에서 3일을 걸었는데도 물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이 마라로 왔으나 마라의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곳의 이름을 마라라고 불렀다. 백성이 모셰에게 불평했다. 이르기를, “우리가 무엇을 마실 수 있습니까?” 그가 하쉠께 부르짖으니 하쉠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셨다. 그가 그것을 물에 던지자 그 물이 달게 되었다...’


이 문장들은 문자 그대로 우리로 하여금 해석을 요구하게 합니다.

문자적인 읽기는 여기서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미드라쉬는 ‘마라의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었다’라는 이 구절을 히브리어로 그들이 쓰라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물이 아니라 사람들이 쓰라렸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쉠께선 나무로 물과 삶의 어려움을 달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가장 단순한 의미에서 토라는 미슐레이(잠언) 3:18에서 ‘그녀는 그녀를 붙잡는 자들에게 생명 나무이니 그녀를 잡는 모든 자들은 행복하다고 불릴 것이다’라고 선언하듯 얘기했던 것이었습니다.


마라에서 이스라엘은 토라의 첫 번째 법을 받았습니다. ‘거기서 그에게 법과 법규를 정하여 주시고 거기서 그를 시험하셨다.’

이스라엘은 마라에서 토라를 받기 시작했고, 그렇게 이 세상의 삶의 물을 달게 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제 여기서 훨씬 더 깊이 마음을 열어보세요.

그럼 이 불평은 무슨 일이고, 하쉠께선 왜 마른 땅에서 바다를 건넌 후 며칠 만에 그토록 빨리 사람들을 시험하셨을까요?

그건 더욱 이해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이쓰라엘 아들들의 모든 회중이 엘림에서 이동하여 엘림과 씨나이 사이에 있는 씬 광야에 왔다. 그들이 미쯔라임 땅에서 나온 후 둘째 달 15일이었다. 이쓰라엘 아들들의 모든 회중이 모셰와 아하론에게 광야에서 불평했다. 이쓰라엘 아들들이 그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고기 냄비 옆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으며 미쯔라임(이집트)땅에서 하쉠의 손에 죽었더라면! 당신들이 이광야로 우리를 나오게 하여 이 모든 공동체를 기근으로 죽게 했소.”’


이 당혹스러운 구절은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토록 고대하던 이집트를 탈출한 지 한 달이 지난 지금에서 사람들은 이미 드러났던 기적과 경이로움을 잊고 탈출을 후회한다는 건가요?

이것은 극도의 인지 부조화의 예이거나 역사적으로 기록된 가장 심각한 단기 기억 상실의 경우일까요?

아니면 그보다 더 나쁘고 훨씬 극단적인 경우일까요?

왜냐하면 그들이 본 그 기적을 그냥 잊는 것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잘못된 기억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서 그들은 이집트의 끔찍하고 가혹한 기억을 포만감을 안겨주던 무료 고기와 빵의 끝없는 공급을 받았던 ‘사랑스러운’ 이집트에서의 즐거웠던 추억으로 대체했습니다.

그런데 이집트에서의 강제노동과 살해 현장에서 식량이 풍부했다고요?

고통도, 노예도 없었던 것입니까?

‘그런데 너희가 우리를 그 낙원으로부터 끌어내어 온 회중을 기근으로 죽게 하려느냐?’


그래서 하쉠께선 그들에게 만(만나)를 주면서 말씀하십니다. ‘보라,내가 하늘에서 빵을 너희에게 비처럼 내릴 것이다. 그 백성은나가서 매일 하루 분을 모을 것이니 이는 그들이 내 토라 안에서 걸어가는지 그렇지 않는지 내가 시험하기 위함이다....그들이 르피딤에서 진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었다...백성이 모셰와 다투어 말했다. “우리에게 물을 주어 우리가 마시게 하시오!” 모셰가 그들에게 말했다. “왜 당신들이 나와 다툽니까? 왜 당신들이 하쉠을 시험합니까?”...그는그 장소의 이름을 마싸 우므리바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이쓰라엘 아들들이 다투었고 그리고 그들이 ‘하쉠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 안 계신가’하고 말하며 하쉠을 시험했기 때문이었다.’


이집트 탈출과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경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만(만나)으로 하쉠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지 묻는다는 겁니까?

그리고 바로 그 때, 이번 파라샤의 당혹감이 정말로 절정에 이릅니다.

이 때 아말렉이 와서 공격한 것입니다.

와우, 하쉠의 구원을 그토록 많이 체험한 후 믿음의 높은 수준에 이르고 나서 하쉠을 시험하면서 ‘하쉠께서 우리 중에 있느냐?’라니요!


이제 어느 때보다 더 깊이 마음을 열어보세요.

현인들은 이것을 이렇게 비유합니다:

한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스럽게 어깨에 이고 있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아이가 이것저것을 보고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빠,저것 좀 주세요’ 그리고 아버지는 그 아이에게 원하는 것을 구해줍니다. 그러자 아버지의 어깨에 올라탄 아이가 당황해 하며 주위를 보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우리 아버지가 어디 있나요? 아버지를 찾을 수가 없어요!’라고 묻습니다.


이번 파라샤의 진행은 우리에게 참된 에무나, 즉 하쉠에 대한 믿음에 대해 가장 깊은 교훈을 가르쳐줍니다.

백성이 바다를 마주하고 이집트인들이 그들에게 접근하는 것을 볼 때 거리가 점점 좁아졌습니다.

끝이라 여기는 상황에 직면했으나, 바다가 갈라지고 구함을 받는 비할 데 없는 기적을 목격했을 때 사람들은 분명 초월적인 경험을 했습니다.

그들은 에무나에 대한 새로운 계시를 받았고, 하쉠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너무도 높아져서 그 감동으로 ‘내 아버지의 엘로킴이시니 내가 그를 높일 것이다.’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토라는 에무나가 어떤 경험, 심지어 경이로운 경험에 대한 감정적 반응에 기초한다면 이것은 결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에무나 슐레마, 즉 ‘완벽한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경험에 근거한 믿음은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감정적 추론일 뿐입니다.그건 주관적입니다.

만약에 에무나가 긍정적 경험에 의해 생성된 흥분과 같은 감정의 결과라면 며칠 후 그것은 사라질 수 있고,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느끼는 강한 감정적 반응은 이번엔 아마 부정적 경험으로 대체될 것입니다.

모든 경험, 심지어 가장 압도적이고 영향력 있는 경험도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고 약해집니다. 따라서 믿음이 경험의 힘으로부터 자라난다면, 경험이 흐려질 때 믿음의 힘도 어두워지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모든 것의 기초는 서로 경쟁하는 경험의 높고 낮음 사이에서 동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법과 법규를 정하여 주시고 거기서 그를 시험하셨다.’라는 하쉠의 토라에 대한 묵상과 이해의 견고한 기초 위에 있어야 합니다.


마라에서 하쉠은 이스라엘에게 참되고 완전한 에무나로 인도하는 견고한 길로서 토라의 닻과 법령과 규례가 필요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거기서 그를 시험하셨다’


사람이 알아야 할 첫 번째는, 시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많이 말입니다.

기복이 있을 것이고,위기가 있을 것입니다.


부정적인 경험에서 여러분의 반응은 어떻게 되나요?

물이 없다고 하쉠께서 계시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마라와 르피딤에서 하쉠께선 그 민족이 항상 순조롭지 않을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맹렬한 폭풍 속에서 길이 항상 기적적으로 열리지만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대처하는 법을 배워야만 하는 어려움의 시기도 있을 것입니다.

쓴 물과 아말렉일지라도요.


시험은 믿음을 갖는 것이 되게 할 것입니다. 하쉠을 따르는 것은 그가 바다에서 본 것과 같은 눈부신 기적일 때 뿐만 아니라 도움이 오지 않을 것 같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에무나와 함께 하쉠을 따르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 쓴 물가에서 그분께서 그것을 시험하십니다. 그분은 그들의 믿음을 시험했습니다. 순간적으로 일시적이며 경험적인 감정 기반의 영감의 힘을 넘어 당신의 에무나를 유지할 수 있나요?

에무나가 경험에 의해 유발된 감정의 결과라면, 그러한 감정이 아무리 강력하고 자극적일지라도 에무나는 결함이 있으며, 내가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새로운 경험의 맹렬한 공격을 견딜 수 없습니다.

따라서 토라는 ‘내 아버지의 엘로킴이시니 내가 그를 높일 것이다’라고 노래하도록 영감을 받은 바로 그 사람들이 잠시 후 돌아서서 ‘하쉠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 안 계신가’를 어떻게 말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그 경험이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놀라운 기적을 통해 구원 받는 경험을 했고, 이제 그들의 경험은 갈증입니다.

그들에겐 물이 없었고, 아이들이 갈증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그건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해서 그들의 에무나가 뒤집어집니다. 한 경험은 다른 경험을 상쇄시키죠.

처음의 경험이 실제였는지 의심한 것은 아닙니다.


에무나의 결함은 경험을 의심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에무나에 결함이 있다는 것은 경험에 기반한 믿음이 안정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단단하지 않음으로, 에무나는 경험에 따라 위아래로 움직입니다.

경험이 강하다면 에무나도 강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렇듯 경험으로 인한 인상이 약해질 때 에무나도 약해질 것입니다.

토라는 ‘내 감정’이 변할 수 있는 것이기에 하쉠에 대한 진정한 믿음이 ‘내 감정’에 근거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감정은 하쉠을 섬기고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데 매우 중요한 측면이며, 영감을 주고 고양시키는 경험은 물론 소중하지만, 그것은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고 하쉠에 대한 믿음의 기초가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안정적이고 견고해야 하는데, 감정은 불안정합니다.

그래서 이번 파라샤는 기적과 경이로운 경험을 바탕으로 에무나를 생성한 이집트로부터의 탈출로부터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주님을 붙들고 그분과 동행하는 길인 토라를 받고 에무나를 경험할 시나이 산의 계시로의 전환을 시작합니다.


이집트에서 시나이 산으로 가는 길에 있었던 모든 위기는 이스라엘에게 ‘거기서 그에게 법과 법규를 정하여 주시고 거기서 그를 시험하셨다.’라는 참된 에무나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사람의 믿음은 절망의 시기에 시험을 받습니다. 이스라엘이 겪게 된 시험은 그들을 가르치고자 부여된 것이지 어려운 때에 믿음을 잃으라고 온 것이 아닙니다. ‘이집트로 돌아가자’, 또는 ‘하쉠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라고 묻지 않아도 됩니다.

물이 높아서 내가 건널 수 없다 하더라도 하쉠에 대한 믿음으로 확신을 유지하고 남아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쉠께선 왜 처음부터 그들에게 만(만나)과 단물을 마시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이집트 탈출부터 시나이 산까지 가는 길이 시험으로 가득 찬 이유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하쉠께선 이스라엘이 참된 에무나, 즉 하쉠에 대한 믿음으로 인도하는 길을 이해하도록 평생 우리 모두를 시험하듯이 경이로운 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시험을 경험하길 원하신 것이었습니다.


라브 하임 리치만 Rabbi Chaim Richman

번역: 아담 리 (유대교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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