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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샤트 악하레이 모트/케도쉼 5783 '거룩한 삶'

샬롬, 세상에서 거룩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거룩함’은 토라 전반에 걸쳐 변함없는 주제로, 하쉠께선 거룩합니다. 그러나 사람도 거룩할 수 있나요?

그들이 거룩하길 기대하는 것이 현실적일까요?

그들이 거룩해야 한다고 요구할 수 있을까요?


이번 샤바트에 우리는 바이크라(레위기)에서 두 개의 파라샤인 16-20장의 악하레이 모트와 케도쉼을 읽을 것입니다.

두 번째 파라샤인 케도쉼은 19:1에서 시작합니다.

‘하쉠께서 모셰에게 말씀하셨다. 이르시기를, “이쓰라엘 아들들의 모든 회중에게 말하여 너는 그들에게 일러야 한다. 너희는 거룩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쉠, 너희의 엘로킴인 내가 거룩하기 때문이다.”’


하쉠께선 이렇게 이스라엘에게 ‘내가 거룩하기 때문에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나요?

하쉠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게 정확히 무엇일까요?

인간이 어떻게 하쉠의 거룩하심에 비하는 거룩한 수준을 위해 노력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물리적 존재이고 물리적 욕망의 세계에 살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든 거룩함에 대한 이 부르심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하쉠께서 모셰에게 백성들에게 가르치라고 지시하신 다른 계명들과 달리, 이것은 일시에 그것을 받기 위해 모인 유대 민족 전체, 곧 그 모든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열어보세요.

토라가 우리에게 주는 깊고 아름다운 진리는, 하쉠께선 그의 권능에 있어 무한하고 절대적이시며 이 세상의 한계를 완전히 초월한다는 것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거룩함의 개념이 그분께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것과도 완전히 분리되어 있으나, 동시에 이 세상과 별개가 아니라는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이 세상 가운데 계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거룩한 민족’으로서 하쉠의 거룩하심을 닮으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이 세상과 단절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사는 삶의 모든 면에서 거룩함의 메시지를 전달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명령 받는 거룩함에 대한 토라의 비전의 본질은 비유대인 세계의 다양한 종교, 철학 등이 숭상하는 거룩함의 개념과 크게 다릅니다.

일부 종교의 수도원의 경우 ‘속세를 떠나는 데 대한 서원’을 하며 그 신봉자들이 스스로 세상의 모든 것에서 멀어지도록 요구하죠.

이러한 세계관은 세상을 경멸하는 것이고, 그것은 실제로 ‘삶’을 경멸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분리됨은 이 세상이 구원받을 수 없고 희망이 없다는 어떤 ‘절망’을 말해주는 것으로, 그에 반해 이스라엘의 인생 사명은 살아 계신 하쉠을 붙드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쉠, 너희의 엘로킴께 붙어 있었던 너희 모두는 오늘 살아 있다.’ (드바림 4:4)


‘살아 계신 하쉠’은 그분께서 생명의 하쉠이심을 의미합니다.

슈모트(출애굽기/탈출기) 22:30에서는 ‘안쉐이 코데쉬 티히윤 리’,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들,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살죠.

그리고 이것이 ‘사람이 거룩하면서도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토라적 생활의 가장 깊은 도전과 약속 및 목표’ 중 하나인 것입니다.


유대 민족에게 명령 된 거룩함은 ‘금욕주의’ 등의 거룩함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쉠을 붙들고 이 세상에서 산다는 거룩함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살아 계신 하쉠께서 능력을 주시고 수여하는 삶으로부터 물러서지 말라고 명령받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하쉠으로부터 나오는 이 삶을 소중히 여기고 즐겨야 하며,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에 감사를 드려야 하죠.


유대 민족은 이 세상 한가운데서 삶 자체를 통해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위로부터 거룩함을 끌어내 올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너희는 거룩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쉠, 너희의 엘로킴인 내가 거룩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의 비밀입니다.


가장 깊게 마음을 열어보세요.

이것은 모두 가장 깊은 진실이면서, 동시에 더 깊은 수준도 있습니다. 거기엔 거룩해지는 진정한 도전도 있습니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말을 빌려보면, 분명 세상도 우리에게 ‘너무 과분한 것’일 수 있습니다.

선이 있고, 별로 좋지 않죠.

이번 구절에 대해 언급하면서, 라쉬는 ‘거룩하라’라는 것을 다음과 같은 의미로 설명합니다:

‘금지된 관계와 그 죄에서 스스로 떠나라. 음란을 막을 울타리가 있는 곳곳마다 거룩함을 발견할 것이다.’

바이크라에 대한 고대 할락하적 미드라쉬인 씨프라는 단순히 ‘거룩하다’를 ‘분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근데 잠깐만요, 토라는 우리가 물리적 존재이고 물리적 욕망의 세계에 살고 있기에 우리의 인간성은 토라를 이해하는 본질적인 부분이고, 하쉠께선 유대인들에게 ‘거룩한 백성이 되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물리적 본성을 인정한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그러나 씨프라에 있는 유대 현인들의 의도는 이 세상의 물리적 쾌락에 대한 우리의 물질적 욕망을 적절하게 제어하고 억제하며 통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람밤은 토라의 모든 영역과 삶의 모든 영역을 다루는 여러 권으로 된 그의 고전 할락하 저서 ‘미슈네 토라’에서 그 중 한 권을 ‘거룩함의 책’이라고 명명합니다.

이 ‘거룩함의 책’은 두 가지 특정 영역에서만 토라의 계명을 제시합니다.

바로 성적 관계에서의 적절하고 부적절한 행동에 대한 구성과 금지된 음식에 대한 법률이 그것입니다.


따라서 람밤은 본질적으로 거룩함이 ‘분리’라면 ‘울타리’를 만들어야 하고, 인간의 이 두 영역에 대한 노력에서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있도록 자신의 욕망을 지배하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들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욕망이고, 다른 어떤 것보다 사람의 천박한 물질적 본성을 중력적으로 지배하는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가장 직접적으로 우리의 육체를 다루고 호소하기 때문에, 그 두 영역에서의 적절한 분리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거룩함을 가져오게 합니다.

모든 계명은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능력이 주입되어 있지만, 그 중 특히 이 두 영역을 적절히 연결시키는 것은 그 자체로 거룩함을 나타나게 합니다.


라브 모셰 하임 루짜토, ‘람할’은 그의 고전적 윤리 저서인 ‘메씰라트 예샤림’에서 진정으로 거룩한 의인의 길은 사람이 본질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외부의 쾌락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것이 가치 있는 행동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 ‘불필요한’ 즐거움에서 분리되는 것이 거룩함의 행위이며, 이것이 바로 사람이 그의 모든 인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완전하게 분리된 하쉠께 매달릴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을 더 깊이 열어보세요.

라브(랍비)는 이 진리의 원칙을 계속하며 사람이 필요한 것에서 분리될 땐 그는 죄인이며 어리석은 자라고 말합니다. 필요한 것은‘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필요한 것과 분리되는 것은 우리에게 금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람밤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분리하는 수준의 주요 측면은 바로 그 두 영역에서 나타납니다. 거기엔 큰 욕구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 인간성의 두 영역인 성욕과 식욕으로부터 가장 강한 욕망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둘 모두 ‘세상의 지속’에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인류의 삶의 지속을 위한 가장 본질적인 구성 요소입니다.


그렇기에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쉠께선 예샤야후(이사야) 예언자가 45:18에서 말했던 것처럼 사람이 살고 번성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늘을 창조하신 하쉠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땅을 짓고 그것을 만든 이, 그가 엘로킴이다. 그가 그것을 굳건히 했다. 그가 그것을 형태도 없이 창조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지으셨다. 나는 하쉠이며 다른 이는 없다.’

그렇게 이 두 영역은 세상의 생존에 필요하기에 인간에게 가장 큰 욕망으로 주어졌습니다.


정확히 이 두 영역에서의 사람의 행동은 고유한 거룩함을 표현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본질적 욕망을 처리함에 있어 스스로를 거룩하게 하고, 그것들을 하쉠의 뜻이란 틀 안에 있게 함으로 창조주를 본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쉠께선 완전히 분리되어 있고, 사람은 아주 조금만 분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여전히 ‘분리 행위’입니다.


하쉠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거룩함의 표현은 특히 이스라엘 땅과 밀접한 연결을 지닙니다.

이스라엘 땅은 고유한 방식으로 다른 모든 땅과 완전하게 분리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신성한 임재인 ‘슉히나’가 거할 수 있도록 하쉠께서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물리적 차원에서, 그곳은 이 물리적 세계의 거룩함의 중심점입니다.

그래서 하쉠께선 그 땅에 들어가기 전 이스라엘에 특별한 주의를 주십니다.

우리는 이번 주 파라샤인 악하레이 모트 18장 끝에서 그 땅의 예전 거주민들이 행한 가증한 일의 맥락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그를 부정하게 함으로 그가 너희 이전에 있었던 그 이방 나라를 토한 것처럼 그 땅이 너희를 토하지 않게 해야 한다.’

신성한 임재인 슉히나는 숨겨져 있더라도 이스라엘에 거하고 있기에 그곳은 ‘거룩한 땅’이며, 불결함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세요. 거룩함으로 부르심은 이스라엘 땅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전세계적으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땅은 ‘거룩함을 만져볼 수 있는 땅’이기에 당연하게도 그 결과는 훨씬 더 가혹합니다.

토라는 이스라엘 땅이 죄인들을 뱉어내며, 그들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불결한 죄는 그 땅으로부터 추방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제 그 어느 때보다 더 마음을 깊이 열어보세요.

파라샤트 케도쉼과 그에 이르게 하는 것들은 이 두 가지만 포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분명 강조되었죠. 맞습니다. 그러나 이번 파라샤는 또 다른 영역, 즉 인간이 그의 동료 인간에 대해 올바른 행동을 할 것에 대한 계명인 ‘미쯔보트 벤 아담 레하베로’도 포함합니다.

이러한 행위들도 거룩함을 표현합니다. 그 거룩함의 절정은 19:18에서 나타납니다:

‘...네 동료를 너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하쉠이다.’


유대 민족의 상징적인 거장, 위대한 라비 아키바는 이 계명을 ‘토라의 주요 원리’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거룩함은 금지된 음식과 금지된 성관계를 끊는 것으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거룩함이 개인의 행동으로도 표현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결국 그 사람이 실제로 누구인지, 말하자면 그 사람의 성격이 누구인지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로 어떤 사람과 그의 친구 사이에 적용되는 계명의 행동엔 다음과 같은 계명이 있습니다:

복수 금지, 일꾼에게 제때에 맞춘 급여 지급, 도둑질 금지, 거짓말 금지, 이런 것들 역시 거룩함의 계명입니다.

그것들은 ‘성행위 및 음식’에 대한 금지된 주요 거룩함의 계명에 함께 포함되는데, 그것들은 ‘분리’로 정의되는 거룩의 개념이 실제로 다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허용되는 표준보다 더 높은 표준 설정’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과 관련해, 토라는 사회가 용납할 수 있는 행동으로 간주하는 것 이상으로 올라가라고 손짓합니다.

예를 들어, 19:18은 ‘너는 네 백성의 자손에게 복수하지 말고 원한을 간직하지 말며’라고 되어 있는 것 등입니다.


원수를 갚지 않는 것도 그렇지만, 유대 현인들은 원한을 품지 않는 것도 ‘저질러진 작은 일을 기억하는 것조차 금지’된다는 것을 의미함을 가르칩니다.

이것은 분명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기준보다 더 높은 요구 사항이죠.


그 진실은 전에 없던 ‘완전히 마음을 여는’것입니다.

이 모든 것의 정점인 ‘네 동료를 너처럼 사랑하라’는 것이 진정으로 성취되기 위해서는 모든 기준보다 몇 광년이나 앞서야 합니다.

그것은 너무 극단적인 수준으로, 토라는 사람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듯 보일 정도입니다.

토라는 예외 없이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듯 다른 이들을 사랑할 것을 요구하는데, 우리가 사람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간의 능력 안에서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받아들일 수 있다고 여겨지는 사회의 모든 규범을 깨뜨리는 명령이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위대한 라비 아키바는 ‘네 동료를 너처럼 사랑하라’가 토라의 주요 원칙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은 ‘추상적인 철학’이 아닙니다. 생각만으로는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사랑은 그의 ‘행동’에 의해 측정되고 시험됩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의 상호 작용에 관한 거룩함의 부분은 매우 실용적이고 실제적인 법칙입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재산에 관심이 있는가?

다른 이들의 명예에 대해선 어떠한가?

다른 사람을 품위와 존중으로 대하는가?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는가?

상대방의 단점만 보지 않고 장점도 보는가?


사랑은 ‘느끼는 감정’만이 아닙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높은 수준이고, 그 수준에 도달하려면 분명 많은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토라는 그것을 ‘추가 학점’같은 것이 아니라 요구 사항으로 명령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것으로 오메르를 세는 바로 이 기간 동안, 유대 현인들에 따르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2,400명에 이르는 라비 아키바의 토라 학생들이 서로를 적절한 존경심으로 대하지 않아 죽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들은 분명 최선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르쳐준 것은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그들은 분명 그들의 토라를 공부했고 우리는 그들이 매우 거룩했다고 가정할 수 있지만 우리는 이제 진정한 거룩함을 측정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부름 받은 기준,우리에게 요구되는 기준이란 것은 매우 높습니다. 이것이 파라샤트 케도쉼의 교훈입니다.


하쉠께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분께선 우리에게 그분을 닮아 거룩해지라고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사람이 자신을 다스려야 하는 영역, 자신을 통제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 그리고 동료를 대하는 방식 모두에서 표현되어야 합니다.


토라의 주요 원칙은 네 동료를 너처럼 사랑하라입니다.


라브 하임 리치만 Rabbi Chaim Richman

번역: 아담 리 (유대교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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