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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샤트 바예셰브 5783 '꿈꾸는 자'


샬롬, 이번 주의 토라 부분은 베레쉬트(창세기) 37장에서 시작하는 그가 거주했다를 의미하는 파라샤트 바예셰브입니다.

이번 파라샤는 야아코브가 총애하는 아들이며 노년에 태어난 아들인 사랑하는 락헬(라헬)의 자식, 요쎄프(요셉)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파라샤트 바예셰브의 일부는 보통 하누카 직전이나 도중에 읽습니다.

토라 공부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매 주의 토라 읽기와 그리고 신성한 때 / 특별한 날 사이에 연결되는 거룩한 동시성이 있음을 보여주는데, 우리는 그런 식으로 특정 시간에 읽히는 부분이 무엇이든 하나도 빠지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 어떤 것도 우연의 일치가 없으며, 요쎄프라는 인물을 하누카와 연결하는 여러 수준의 의미가 있기에 그것은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교훈을 드러내 줍니다.


그의 생애에 관한 이 단계에서, 우리는 야아코브(야곱)가 마침내 크나안(가나안) 땅으로 돌아간 것으로 어느 정도의 평안을 얻기를 바랍니다. 그가 라반의 속임수로부터 드디어 해방됐기 때문입니다.

에싸브(에서/에사우)와의 대결, 디나의 비극, 쉼온과 레비의 복수가 모두 지나간 일입니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요쎄프와 그의 형제들 간의 끔찍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그의 형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그의 모든 형제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했다. 그들은 그에게 편안하게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이 이 안에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베레쉬트의 내용에 대한 지금까지의 공부를 통해, 우리는 표면적으로 이야기 책처럼 보이는 것이 단순히 이야기를 읽도록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게 됐습니다.

이때의 세대들은 자신의 개인적 정체성을 초월한 보편적인 주제의 표현이 되는 원형을 가진 자들입니다.

하쉠께서 역사적 과정의 형태로 움직이게 하신 위대한 교정 그 자체인 것입니다.

이들은 미래를 위한 본보기이며, 모두들 자유로운 선택을 허용하고, 구속의 때까지 울려 퍼질 자들입니다.

리브카가 그녀의 태 안에 있던 아이들인 야아코브와 에싸브가 단순한 두 개개인이 아니라 국가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듯이, 요쎄프와 그의 형들에게도 그들보다 훨씬 더 많은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논쟁은 내적 의미를 지니는데, 그들은 이 세상에서 하쉠을 섬기는 적절한 방식에 서로 동의하지 않던 것입니다.

야아코브는 요쎄프의 본질로부터 의로움의 특별한 부분을 인식했습니다.

유대 현인들이 가르치는 바는, 의인 요쎄프는 세상을 지탱하는 기둥이라는 것입니다.

태어난 날부터 죽는 날까지 그는 신성한 지혜의 축복을 받고 신성한 영감인 루악흐 하코데쉬(성령)의 이끌림을 받았습니다.


야아코브는 쉠과 에베르로부터 받은 모든 토라 지식을 그에게 넘겼습니다.

야아코브는 인류를 하쉠과 일치시키고 에덴에서 잘못되었던 것을 고치기 위한 다음 단계로 역사의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데 있어서 ‘하쉠의 대리자’로써 한 국가를 인도할 자가 요쎄프라고 확신했습니다.


토라적 지식의 가장 깊은 비밀을 그와 공유하는 것 말고도, 야아코브는 요쎄프에게 족장들의 유산을 그에게 전달함을 상징하는 특별한 의복도 선물합니다.

그러나 형들에게 이러한 행동은 노골적인 편애의 표시로 비춰졌습니다.

이것은 분명 그들의 질투심에 기여했고, 심지어 그에 더해 요쎄프에 대한 증오를 가속화했습니다.


요쎄프는 형들에게 자신의 꿈을 말함으로써 더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제가 꾼 이 꿈을 들어보세요! 보세요, 우리가 밭 가운데서 곡식단들을 묶고 있는데, 보세요, 내 곡식단이 일어나 섰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곡식단들이 둘러섰고, 보세요! 제 곡식단에게 절했습니다.” 그의 형들이 그에게 말했다. “너가 우리 위에서 왕이 된다는 말이냐? 너가 우리를 다스린다는 말이냐?” 그리고 그들이 그의 꿈들과 그의 말 때문에 그를 더욱 더 미워했다...그의 형들이 그를 질투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 일을 간직했다.’


자 이제 여기서 진지하게 마음을 열어보세요.

이건 설명할 수가 없는 행동입니다.

요쎄프의 두 가지 꿈을 해석하는 건 우주 과학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그에게 절하러 올 것입니다.

후에 이집트에서 그의 형제들이 그들 앞에 있는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고 절했을 때 정확히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요쎄프는 왜 그들에게 이것을 말했을까요? 그는 형들이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는 왜 자신의 꿈을 그들에게 말함으로써 불에 기름을 더했을까요? 누가 그렇게 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더 깊은 질문은, 요쎄프는 왜 이 꿈을 꾸어야 했을까요?

하쉠께선 왜 그것을 그에게 보여줘야 했을까요?

그리고 그들은 왜 그 앞에 절해야 했을까요?


형들은 그를 몽상가라고 비난해왔는데, 37:19에서 “보라, 저 꿈꾸는 자가 온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용하는 히브리어 표현인 ‘바알 학할로모트’는 실제로는 ‘꿈의 주인’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관심 있어 하면서도 걱정했던 이유였습니다.

그들은 그가 게으른 몽상가 같은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아버지 야아코브는 어땠을까요?

그는 그 일을 마음에 간직하여 때를 기다리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럼 이제 요쎄프와 꿈들은 어떻게 되나요?

아직 남자가 아니었던 이 의로운 소년의 삶에는 꿈이 얽혀 있는데, 그는 자신의 꿈 때문에 이집트에 팔려가고, 어둡고 불결한 곳에서 위대해짐도 술 시종장과 빵 시종장의 꿈 때문과 파르오 그 자신의 꿈 때문이었습니다.


토라의 메시지는 영원하고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기에 요쎄프의 꿈은 미래 세대를 위한 표징이기도 합니다.

토라는 역사책도 아니고 이야기 책도 아닙니다. 이런 꿈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줄까요?


자, 마음을 가장 깊이 열어보세요.

꿈꾸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나요?

저는 그 꿈을 이해하고 싶은 이유가, 요쎄프는 꿈꾸는 자이고 꿈이란 것은 어둠 속에서 꾸며, 요쎄프가 이집트라는 어둠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 때문입니다.


꿈을 꾼다는 것은 다른 수준의 현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꿈을 꾸기 위해서는 잠을 자야 합니다.

잠자는 것은 어둠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우리는 자면서 자신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내면의 시각과 자각을 의식적으로 이끌 수 없습니다.

잠을 잘 때 우리는 현실에 대해 우리 자신을 두는 개념으로부터 주변 환경과 단절됩니다.


우리가 꿈꾸는 것은 이 무의식적인 어둠의 상태입니다. 따라서 유대 현인들은 일반적으로 꿈이 어느정도 말도 안되는 것을 특징으로도 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의 무의식적인 마음은 상상에 의해 흔들리고, 어쩔 때는 두려움이나 불안에 시달릴 수 있는 무형의 이미지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또한 허구와 많은 요인도 꿈에 영향을 줍니다.

그리고 낮 동안의 가장 중요하지 않아했던 생각은 악몽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먹는 것조차 꿈을 꾸게 할 수 있는데, 그래서 즉하르야(스가랴/즈카르야) 10:2에서는 쉽게 의역해보자면 ‘꿈꾸는 자들은 거짓을 말한다’고도 하는 겁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는데, 모든 꿈이 거짓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꿈은 예언의 요소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어둠 속의 잘못된 표현은 걸러질 수 있고 그를 통해 꿈은 더 높이 하쉠의 진리에 대한 계시를 제시하고자 명확해질 수 있으며, 깨어 있는 인간의 일상적 시야보다 더 높은 내면의 시야를 밝혀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시야가 끝나는 평범한 경계를 넘어 예언적 시야가 열리는 것입니다.


꿈은 예언적 암시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꿈이란 것이 예언의 경험이라는 것의 1/60이라고 유대 현인들이 가르치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내부적인 모순이 있는듯 보입니다.

바로 인간의 이성적 관점에서 꿈은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수면 중에 발생하는 것 때문입니다.

이것은 환각에 비유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단순히 무의미하고 단절된 생각을 재활용 해줍니다.

그러나 여전히 상상과 거짓된 이미지에 의해 크게 통제되는 어둠의 깊이에서, 경계가 무너지고 모든 추정이 일시적으로 중단되는 것 때문에 꿈은 최고의 진리에 대한 반짝이는 계시를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말 그대로 쉬르 하쉬림(아가서) 5:2에서 반영된 ‘내가 자도 내 마음은 깨어 있으니’라는 비밀의 측면처럼 말입니다.


하쉠께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 포로가 되는 것이 그분의 계획에서 이제 필요한 단계가 시작되어야 함을 결정하셨고, 요쎄프와 그의 형들의 이야기는 다가오는 이집트 포로의 경험을 견디기 위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하쉠의 준비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고 이집트를 나오는 것에 합당하게 됩니다.

실제로 그림자들은 이미 지평선에 모여들고 있었고, 야아코브의 후손들과 그의 자녀들은 곧 그 어둠의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하쉠께서 아브라함과 ‘부분들 사이의 언약’이라고 알려진 베레쉬트 15장 ‘렉흐 렉하’ 파라샤에서 맺었던 언약의 한 측면이었습니다.

‘너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네 자손이 그들의 땅이 아닌 곳에서 400년동안 낯선 이들이 되어 그들을 섬길 것이고 그들은 그들을 괴롭힐 것이다.’

요쎄프의 꿈은 그를 이집트로 내려가게 하고, 그의 형제들과 아버지를 그의 뒤를 따라 내려오게 했습니다.


여기서 마음을 더 깊이 열어보세요.

의인 요쎄프의 꿈은 그 언약을 이행하는 데 필수적인 부분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이집트 유배의 중심점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요쎄프에게 달렸습니다.


그는 먼저 이집트에 있는 그의 형제들을 부양했으며, 그런 다음 슈모트(출애굽기/탈출기)의 시작 부분에서 배우게 되겠지만, 이스라엘의 노예화는 요쎄프를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이 일어날 때 시작됩니다.

그리고 요쎄프는 죽기 전에 베레쉬트 50장 파라샤트 바옉히의 끝부분에서 하쉠께서 반드시 그들을 기억하실 것이라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확신시키면서 구원을 예언했습니다.

그러고나서 이집트를 나갈 때 그의 뼈도 함께 나갑니다.


그런데 왜 그 사람이어야 했을까요? 왜 요쎄프가 모든 것의 중심에 있어야 했나요?

한 수준에서, 우리는 락헬의 자녀가 레아의 자녀보다 앞서는 것을 봅니다.

락헬의 아이들이 길을 닦고 구속을 시작합니다.


락헬의 후손인 빈야민(베냐민)지파의 샤울 왕은 레아의 아들 예후다(유다)의 후손인 다비드 왕 앞에 앞서는 초대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언자 오바드야(오바댜)는 에싸브를 멸망시킬 자가 요쎄프의 집이라고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샤울 왕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하만은 빈야민 지파인 모르덱하이(모르드개)에게 넘어갑니다.

마쉬악흐 벤 요쎄프(요셉의 아들 메시아)의 모습을 한 요쎄프는 구속의 때까지 역사 전반에 걸쳐 그 모습을 드러내며 물리적 빌드업을 준비합니다.

따라서 그는 예후다와 그의 형제들이 이집트에 도착하기 전 이집트의 영적 어둠 속에서 통치해야 했습니다.

마쉬악흐 벤 요쎄프의 힘은 내적인 영적 차원에 해당되는 마쉬악흐 벤 다비드(다윗의 아들 메시아)를 위한 길을 미리 준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집트의 퇴폐기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갓 태어난 이스라엘 민족은 돌이킬 수 없는 영적 손상을 입을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예언자 옉헤즈켈(에스겔/에제키엘)은 20:7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각 사람은 그의 눈에 혐오스러운 것들을 내던지고 미쯔라임(이집트)의 우상들로 자신들을 부정하게 하지 마라. 나는 하쉠, 너희의 엘로킴이다.”’


요쎄프는 바로 이 문화의 중심인 파르오의 집에서 자랍니다.

그는 모든 이집트를 통솔하는 두 번째 사람이었고, 그 이교 문화에 깊이 관여했지만, 여전히 전적으로 의롭고 하쉠께 전적으로 충실한 자였습니다.

오직 요쎄프만이 외국 땅에서 충절, 정체성, 순결을 지키는 완전한 모범을 보였습니다.

그는 절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감옥에 있을 때도 의인이었고, 낮은 자였지만 결코 절망하지 않았으며, 하쉠의 손이 항상 그의 위에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파르오의 부왕으로서 권력의 정점에 올랐을 때도 의인으로 남았습니다.


이 세상의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순수함을 유지한다는 것은 큰 도전입니다.

맨 아래에 있는 것과 맨 위에 있는 것은 모두 우리에게 우리의 신념과 가치에 대해 타협하도록 강요할 수 있습니다.

요쎄프의 최저점과 최고점은 유배지에서의 유대인들의 경험과 유사합니다.

그의 비결은 하쉠께 집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여기서 요쎄프의 꿈에 대한 야아코브의 수수께끼 같은 반응을 이해하게 됩니다.


베아비브 샤마르 에트 하다바르,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 일을 간직했다’라는 것은 말 그대로 ‘그는 그 문제를 지켜 보았다’라는 것으로, 야아코브는 그것을 예상하고 그때가 올 것을 알고 기다린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그들 모두가 요쎄프에게 절해야 했던 것일까요?


야아코브는 요쎄프의 꿈이 훨씬 더 위대한 것을 묘사하고 있다는 걸 이해했습니다.

그의 모든 자녀가 이집트에서 포로가 될 미래와 관련이 있는 것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쎄프가 그의 꿈을 그의 형들에게 얘기한 이유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요쎄프가 자기 마음대로 그들을 다스리려 한다는 오만함으로 여겨 시기와 미움을 보였지만, 그가 과연 그들에게 질투를 불러 일으키기 위해 자신의 꿈을 말했을까요?

요쎄프는 자신의 예언적 꿈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에게 요구되는 막대한 개인적 값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자신에게 달린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만이 제공할 수 있는 음식을 통해 육체적 / 영적으로 그들을 위해 길을 닦고 그들을 부양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그의 변하지 않는 의로운 모범을 통해서 말입니다.

야아코브는 그 꿈이 예언적이라는 것을 알고 그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이제 어느 때보다 더 깊이 마음을 열어보세요.

그의 위대한 의로움으로 인해 요쎄프는 물리적 세계와 성공적으로 어울릴 수 있었고, 따라서 그는 어둠과 불결함의 중심인 이집트의 모든 곳을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요쎄프 자신은 어둠 속으로 내려와 어둠을 비추는 빛이었습니다.

요쎄프는 그의 빛이 ‘잠자는 것과도 같은’ 어둠의 세계를 관통시키는 꿈꾸는 자였습니다.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는 것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빛인 을 붙잡고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하누카 이야기에서의 마카비 영웅들인 ‘하슈모나임’ 사제들은 꿈을 굳게 잡고 있었습니다.

유대 현인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그리스인의 압제를 어둠에 비유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이스라엘 땅을 침략하고 거룩한 성전을 더럽히며, 유대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과 유일하신 하쉠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는 것에 반대하는 법령을 제정했을 때, 유대 현인들은 그들이 이스라엘의 눈을 어둡게 했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들이 하쉠의 지혜를 몰아내려고 시도하면서 이스라엘 위에 ‘인간의 지성’이라는 어둠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메노라에 불을 붙였던 기름의 기적은 그 어둠에 대한 하쉠의 빛의 승리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쎄프의 비밀입니다.

그의 의가 세상에 가져온 것은 하누카와 그의 이야기의 융합인 것입니다.

그는 어둠 속의 빛의 광선이었습니다.


라브 하임 리치만 Rabbi Chaim Richman

번역: 아담 리 (유대교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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