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샤트 키 테쩨

샬롬, 이번 주의 토라 부분은 드바림(신명기) 21:10에서 시작되는 여섯 번째 파라샤, ‘네가 전쟁터에 나갈 때’입니다.


모셰는 하쉠의 계명인 미쯔보트에 따라 살며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노력할 땅에 들어갈 민족을 계속 준비 시킵니다.

이 토라 부분은 토라의 다른 어떤 부분보다 더 많은 계명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삶의 영역을 포괄하는 매우 다양한 신성한 가르침으로써, 총 74개입니다.


이 계명들 중 일부는 일상적인 상황과 관련되어 있고, 일부는 수행할 기회가 드물게 발생하며,일부는 쉽게 이해되기도 하지만 일부는 더 어렵기도 한데, 이번 주의 부분에서만 발견되는 계명들에 대한 알맞는 이해는 평생동안 ‘헌신적 연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 그것들 모두의 공통점은 ‘풍부하고 다양한 계명’이라는 것이며, 평생동안 어디서나 언제나, 그리고 모든 상황에서 ‘사람’을 동반합니다.


창조주와 우리와의 관계는 우리 자신의 의지들을 그 분의 뜻에 복종시키려는 우리의 의지에 기초합니다.

이스라엘이 시나이 산에서 ‘우리가 행하고 듣겠습니다’라고 선언한 것처럼 그것은 ‘행동’에 근거한 언약입니다.

따라서 이 계명들은 우리의 모든 행동에 가치와 목적을 부여합니다.


우리가 하쉠의 뜻을 행하는 것은 우리의 ‘진짜’가 누구인지 잊게 하는 거칠고 공허한 물질주의의 늪으로부터 우리를 끌어 올려주고, 우리의 더 높은 본질과 내면의 신성한 영을 깨워 줌으로써 우리의 인간성을 고귀하게 해줍니다.

이것이 계명의 모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계명들은 이 세상에서 경건함으로 연결하게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음을 의미합니다.

현자들은 이 비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바다에서 배 밖으로 떨어졌다. 선장은 그에게 밧줄을 던지고 ‘살고 싶으면 이 밧줄을 붙잡고 놓지 마시오!’라고 소리쳤다.”

해서 그처럼, 계명들은 이 세상으로부터 우리의 생명을 구해주는 것입니다.


하쉠께선 유대인들에게 드바림 4:4의 구절처럼 ‘하쉠, 너희의 엘로킴에게 붙어 있었던 너희 모두는...’이라고 부르시며 ‘하쉠에게 붙어있는 너희들은 오늘 모두 살아있다’라고 하십니다.

해서 마음을 열어보면, 여러분 모두는 토라와 그 모든 계명들이 여러 수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첫째로, 단순하고 직접적인 의미의 수준,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지만 그와 동시에 평행 우주처럼 거기엔 다른 차원의 의미도 있으며, 점점 깊어지는 이해의 시야가 열리기도 하는데, 이것들은 인간이 자신의 긍정적 행위를 통해 성취할 수 있는 상위 수준과, 우주적 교정을 암시하는 개념을 드러내는 ‘이해’의 내적 차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언제나 이러한 수준들을 알고는 있다지만, 곧 지나가는 히브리 달력의 마지막 달인 엘룰 월 동안 우리는 이러한 평행우주적 의미의 세상에 여러분은 얼마나 더 신경을 쓰고 있나요?


태고적부터 신성하게 지정된 회개와 내면의 성찰, 그리고 영적 활동을 위해 특별히 지정된 기간인 엘룰 월에 읽는 모든 토라 부분은 이 시대의 목표를 반영하는 주제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의 파라샤 부분은 전쟁이라는 주제와 포로가 된 여자들의 법으로 시작하여 아말렉과의 전쟁으로 끝을 맺습니다.


사실, 엘룰 월의 의식들은 악에 대한 우리의 선전포고입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우리 내부의 악한 성향에 대항하는 우리의 투쟁인데, 엘룰 월의 회개는 곧 우리 자신의 부정을 뿌리 뽑고 변화하려는 의지가 우리가 ‘승리할 수단’임을 보여줍니다.


엘룰 월은 우리에게 손짓하는 더 높은 근본, 즉 우리 영혼의 신성한 원천에 초점을 맞추는 기간입니다.

그것은 지난 1년간 무슨 일이 있었든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그것들과 연결되기를 원하는지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마치 다비드(다윗)왕이 트힐림(시편) 119:127에서 ‘제가 당신의 계명들을 금보다 순금보다도 더 사랑했습니다.’라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 파라샤에서 우리는 어떤 잃어버린 재산을 그 주인에게 돌려주라는 계명을 발견합니다.

22:1은 ‘네 형제의 소나 그의 양을 보고 그것들을 못 본 체하지 말아야 한다. 너는 반드시 네 형제에게 그것들을 돌아가게 해야 한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렇게 토라는 우리에게 ‘너 자신을 숨길 수 없다’라고 지시합니다. 못 본 체 할 수 없다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이 계명은 토라에 처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인데, 이것 또한 파라샤트 미슈파팀에 있는 슈모트(출애굽기/탈출기) 23:4에서 약간 다른 형태로 나타납니다:

‘너가 네 원수의 소나 그의 길을 잃은 나귀를 마주치면 너는 그것을 반드시 그에게 돌아가게 해야 한다.’


지금의 우리 시대에는 소나 당나귀를 가진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근데 이것은 ‘제목’이고, 특정 시나리오일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범주이며,토라는 여기서 잃어버린 소지품을 반환할 수 있도록 도울 의무에 대해 얘기하는데, 다른 이가 잃은 것을 되찾도록 도우라는 부르심의 내적 차원이란 ‘영적 손실’을 의미할 뿐 아니라, 한 사람의 소유물이 모두 제자리에 있을 수 있고 그의 모든 소유물이 세어졌지만, 반대로 그가 모든 것으로서 잃을 수도 있는 삶의 기쁨, 의지, 자신감, 영적 진실성 등을 잃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자신 또한 이 세상에서 완전히 길을 잃을 수도 있어서, 토라는 여기서 우리가 보지 못하는 척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숨길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상대방이 잃어버린 것을 되찾게끔 도우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당신 원수의 동물은 방황하지만 당신 형제의 동물은 길을 잃습니다.

토라는 두 가지 수준의 상실이 있음을 가르칩니다. 하나는 방황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길을 잃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버려진 것입니다.

그저 방황할 뿐인 당신의 적은 당신의 형제보다 훨씬 더 쉽게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가장 깊게 마음을 열어보세요.

거룩한 바알 쉠 토브는 매우 깊은 생각을 강조했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하든 그는 자신을 반영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대립은 크든 작든 ‘거울’이 되어 우리에게 개인적 성장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개인이 다른 이를 흠잡을 때, 그의 동료에게서 보는 것은 바로 ‘자신의 결점’입니다.

그는 다른 이에게서 그것을 볼 것이지만 자신으로부터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하쉠께선 그의 연민으로 그에게 신호를 보내어, 그가 회피함에도 이것이 그가 정말로 해야 할 일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러나 이 내면의 영적 작업은 무엇보다도 어려운 것인데, 누군가가 길을 잃는 것을 보게 되면 그것은 바로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로, 거룩함으로부터 아주 멀찍이 떨어진 누군가를 본다면, 그것은 내가 내 안으로부터 노력해야 함을 의미하는 징조입니다.


양자적인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나의 회개와 변화에 대한 나의 열망, 그리고 하쉠에 대한 친밀감은 내 동료들에게 영감을 주고 고양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며, 나아가 우리들이 함께 전세계를 고양시킬 수 있습니다.

온 세상은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을 그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 날에 큰 쇼파르가 불어지고 아슈르(앗수르)땅에서 망하여 길을 잃은 자들과 미쯔라임(이집트) 땅에서 추방된 자들이 와서 예루샬라임의 거룩한 산에서 하쉠께 엎드릴 것이다’라고 말한 것에 대한 예샤야후(이사야)27:13의 예언의 비밀입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내면의 작업을 할 때 일어날 수 있으며,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좋은 점을 발견하게 하고, 서로에게서 차례로 좋은 점을 보고자 노력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엘룰 월의 모든 것입니다.


잃어버린 거룩한 영들과 길을 잃은 영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길을 가다가 그 중 하나를 만날 때, 우리의 눈으로 판단하고 단점을 보는 대신 그들을 다시 돌아오게끔 도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절망적인 느낌으로 우리 세대의 상황을 바라보며 절망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왕은 현장에 있습니다.

현장은 바로 ‘이 세상’입니다. 엘룰 월인 이 때는 모든 것이 잃어버린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그렇게 보일지라도 우리가 온 세상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요구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하쉠께서 우리 각자의 앞에 두시는 모든 순환 경로를 통해 우리의 개인적, 공동체적, 국가적, 그리고 전세계적 운명을 성취하게끔 인도하는 신성한 계획의 일부입니다.

모든 사람들, 모든 개개인은 특히 자신이 ‘완전히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그 잃어버린 것을 돌려주는 데 도움이 되는 위대한 계획에서 해야 하는 역할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세대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에 있어 마음을 깊게 열어보세요.

다비드 가문의 마쉬악흐(메시아)로 기대되는 마쉬악흐 벤 다비드(다비드의 자손 메시아)의 오심은 당나귀와 관련이 있다는 걸 잘 알 겁니다.

예언자 즉하르야는 9:9에서 ‘매우 즐거워하라, 함성을 올려라...보라, 네 왕이 네게 오니 그는 의롭고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니’라고 합니다.

그가 나귀를 타고 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멋진 렉서스 차량은 왜 안됩니까? 적어도 왜 저렴한 소형차조차 아닐까요?


이것은 가장 깊은 비밀입니다.

히브리어로, 당나귀는 ‘하모르’라고 합니다.

그런데 동음이의어로 하모르는 ‘물질주의’ 자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는 와서 나귀를 타고 들어갈까요?

당나귀는 코셔 동물(정결한 동물)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잘 모르지만 유대 현인들은 그 울음소리가 마치 타메,타메,즉 ‘부정하다,부정하다!’라는 단어로 말하듯 우는 것처럼 들린다는 사실을 조심스레 관찰해 왔는데, 그 내면에는 보이지 않는 잠재력과 구속되길 기다리는 특별하고 거룩한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슈모트 13장에는 여러분도 알다시피 613개의 신성한 계명 중 독특하고 희귀한 계명 중 하나인 ‘나귀의 첫 새끼’를 구속할 것을 요구하는 게 있는데, 이것은 분명 흔치 않고 드물어서, 그렇기에 하쉠의 눈에 귀중한 이 계명은 모든 외적 지시에 따라 모든 의도와 목적이 부정한 동물과 함께 수행 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비밀입니다.


마쉬악흐가 오시는 세대는 그야말로 ‘부정하다’고 하는 세대와도 같은데, 겉으로 봐서는 구속의 기능이 없어 보이며, 그것은 마치 길을 잃고 방황하며 버림받은 듯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겉을 형식적으로 볼 때 얻는 인상일 뿐이며, 외적인 모습으로만 근거해 판단을 내리는 경우입니다.

그 깊은 곳에는 위대하고 독특한 거룩함이 있어, 나타나지길 기다리고 밝혀지길 기다립니다.


마쉬악흐는 그 이름에서도 보이듯 심한 물질주의와 육체주의를 나타내는 동물인 당나귀를 타고 옵니다.

그가 당나귀를 타고 오는 것에 대해, 비유적으로 예언자는 우리에게 ‘그는 더 깊이 보기에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버려졌다 하는 자들을 돌아오게 하고, 인류를 재결합시키고, 아이들의 마음을 아버지들에게 돌리기 위해 온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내면의 선함과 순수함, 그리고 자신의 세대의 거룩함을 드러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입니다.


글쓴이: 라브 하임 리치만 Rabbi Chaim Richman

번역: 아담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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