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샤트 쇼프팀

샬롬, 이번 주 토라 부분은 드바림(신명기) 16:18에서 시작되는 다섯 번째 파라샤 ‘쇼프팀’입니다.


파라샤트 쇼프팀은 항상 엘룰 월 첫 번째 안식일에 읽혀지며, 이 부분에는 이 특별한 달의 특성을 반영하는 많은 계명들이 있습니다.

정의와 주권에 관한 계명, 그리고 어떤 수준은 엘룰 월의 주제와 영적 목표로 연결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는 많은 개념 등입니다.


18장에서, 이스라엘 아들들은 크나안(가나안) 땅의 이교도 민족들 사이에 만연했던 다양한 주술, 잘못된 믿음들, 그리고 미신들에 대해 경고를 받습니다.

‘너는 하쉠, 너의 엘로킴께서 네게 주시는 그 땅으로 들어올 때 나라들의 가증함대로 행하는 것을 배우지 말아야 한다. 그의 아들이나 그의 딸을 불에 지나가게 하는 자나 점치는 자나 점성술사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사나 신접자나 죽은 동물을 부리는 주술사들에게 묻는 자가 네 가운데서 발견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일을 하는 모든 자는 하쉠께 가증하니, 이 가증한 일들 때문에 하쉠, 너의 엘로킴께서 네 앞에서 그들을 쫓아내신다. 너는 하쉠, 너의 엘로킴과 함께 순전해야 한다.’


이것들은 징조, 요술, 주문, 매개체, 신탁, 죽은 것들로부터의 메시지를 포함해 미래를 밝히려는 모든 종류의 시도에 대한 금지입니다.

이 모든 금지된 관행에는 불결한 힘에 자신을 바치는 것이 포함되며, 이는 파괴와 죽음의 측면으로부터 에너지를 끌어냅니다.

이 구절들은 13절에서 절정에 이르는데, 이러한 이교도의 신앙들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짧은 진술은 이번 엘룰 월의 주요 영적 목표 중 하나를 실제적 구절로 표현합니다:

너는 하쉠, 너의 엘로킴과 함께 순전해야 한다


원문의 ‘타밈’이란 단어를 ‘순전함’으로 번역하는 것 외에도, 타밈이란 단어는 ‘하쉠, 너의 엘로킴과 함께’ 타밈이 될 것이며, 완전함, 결백, 전심, 심지어는 ‘단순함’의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의 맥락에서,이 모든 단어는 서로 바꿔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구절의 메시지는 ‘단순하고 완전한 믿음’으로 신실함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쉠과 함께 순전하라’는 이 부르심을 어떻게 성취해야 할까요?


라쉬는 이 구절을 ‘단순함 속에서 하쉠과 함께 생활하고, 기대 속에서 그 분을 바라보며,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예측하려고 하지마라. 오히려, 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단순하게 받아들인다면 너는 그 분과 함께 있을 것이고 그 분의 몫이 될 것이다’라는 의미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어둠의 세력을 조종하려고 하거나 자신들이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사기에 속아 미친듯이 미래를 예견하려는 것과는 달리, 토라는 유대인들에게 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하쉠에게 진심으로 헌신하라고 명령합니다.


미래가 불러올 일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매우 인간적인 일입니다.

특히 세상이 ‘우연의 일치’로만 지배된다는 ‘무신론적 혼돈’으로 보는 사람들이나, 심지어 세상이 ‘인간을 파괴 시키려는 악의 세력이 지배하는 곳’이라고 보는 사람들에게, 알 수 없는 내일에 대한 집착은 불안과 공포의 격변을 불러 일으킵니다.


우리의 고통이 우리로 하여금 안전과 안심을 추구하도록 만들 때, 우리는 불결한 믿음이나 의식을 통해서는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하쉠에 대한 우리의 믿음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이 구절과, 그리고 이 구절이 여기서 놓인 이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입니다.

그렇지만 ‘단순한 믿음’이 ‘단순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오류를 범해, 이 모든 것이 ‘토라가 우리에게 너무 많이 생각하지도, 그리고 지나치게 생각하지도 말라고 말한다’는 의미라고 마치 ‘단순한 믿음의 개념’이 ‘자극 받은 지성’과 모순 된다는 것처럼 잘못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열어보세요,

미드라쉬 시프레는 이 구절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쉠, 너의 엘로킴에게 순전하라 – 너가 마음을 다할 때 너의 몫은 하쉠, 너의 엘로킴의 몫과 함께 한다.’


다비드(다윗) 왕은 트힐림(시편) 26:11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순전함(베투미)으로 걸어가니, 저를 구속하시고 제게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그리고 41:13에서는 ‘당신께서 순전하게 저를 붙드셔서 당신 앞에 영원히 저를 세우셨다는 것을 압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들은 이 수준이 사람이 열망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 중 하나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토라는 ‘순전’의 속성을 통해 문자 그대로 ‘하쉠과 하나가 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이것은 노악흐(노아)와 야아코브(야곱)에 대한 칭찬이기도 했었습니다.

노악흐는 ‘당대에 완전한 타밈(순전한 자)’으로 묘사되고, 야아코브는 ‘단순한 자’라는 ‘이쉬탐’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니 이것을 한 번 들어보세요,

창조주의 완전한 사랑 노래인 쉬르 하쉬림(아가서)의 비유에서, 하쉠께선 이스라엘을 문자 그대로 ‘내 완전한 것, 내 완벽한 것’이라는 의미의 ‘타마티’, 즉 ‘나의 테미마’라고 두 번 언급하셨습니다.

5장과 6장에서 하쉠의 관점에서 본 그 구절들은 이스라엘을 ‘나의 비둘기, 나의 누이, 나의 완전한 자’로 부릅니다.


유대 현인들은 이스라엘이 트미무트(순전한 것들)의 이런 속성을 보여준 곳이 시나이 산에서 토라를 주는 때였다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알다시피, 토라는 이스라엘이 하쉠의 토라를 받아들일 어떤 전제 조건도 달지 않았다고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슈모트(출애굽기/탈출기) 24:7에서 배웠듯이 그들이 꼭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포함하여 집단적으로 하쉠의 모든 계명을 지킬 것을 선언했습니다.

‘하쉠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행하고(나아쎄) 듣겠습니다(베니슈마).’라는 말은,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행하고’, 무조건적으로 그 분의 뜻을 수행하면서 우리의 능력이 닿는 데까지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해되지 않는 계명이 있더라도 우리는 ‘똑같이’ 그것을 이행할 것입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쉬르 하쉬림에서의 비유는 하쉠께서 응답하시는 걸로 묘사합니다. ‘내 사랑, 내 사랑하는 나의 테미마, 나의 순전한 자야’

그들은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간단하게 선언했습니다. ‘당신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든지 우리는 당신의 것이고, 우리는 행할 것입니다.’


그 깊은 진실은, 하쉠께 마음을 다해 ‘타밈’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하쉠의 뜻대로만’이며, 비툴(무효)로 알려진 상태로 오고자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무효화한다는 것입니다.

비툴이란 말은 무효나 취소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취소시키고 그의 본성을 하쉠의 앞에서 취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 우리의 걱정, 우리의 두려움, 우리의 사소한 개인적 문제들을 하쉠에게 무효화 시키는 ‘원래의 행위’이며 진정한 취소의 훈련임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토라가 ‘하쉠과 함께 순전하라!’라고 소리 높여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내일, 그리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당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해 걱정하지 말고, 매일 하쉠과 함께 살며, 하쉠으로부터 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라!” 즉, ‘믿음으로’ 올 모든 것을 받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유대 현인들이 가르치는 ‘가장 높은 수준’의 믿음입니다.

그것은 라브(랍비) 아키바가 가르친 대로, ‘무엇이든’ 그 안에서 그 분을 의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쉠께서 하는 일은 모두 좋은 것을 위한 것입니다.

그가 스승이었던 낙훔 이쉬 감주로부터 배운 생활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것 또한 좋음을 위해서이다’

겉으론 어떤 것이 나타나든, 인간을 위한 하쉠의 궁극적 계획은 ‘좋음’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아버지인 아브라함 아비누(우리의 아버지)의 믿음의 수준이었습니다.


실제로 베레쉬트(창세기) 17장에선 ‘나는 엘 샤카이(전능자)다. 내 앞에서 걸어가며 순전(타밈)하라.’라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아브라함이 ‘지식을 잃은’ 여러 세대를 거친 후 하쉠을 처음으로 믿었던 사람이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상숭배에 대항하여 파괴한 사람은 바로 그였습니다.

그러고서 그는 한 분인 하쉠에 대한 믿음을 세상에 되돌려주고 하쉠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깊은 방법으로 마음을 열어 아브라함에게 ‘내 앞에서 걸어가며 순전하라’고 말씀하신 하쉠의 부름에 뭐라고 응답했는지 이해해 보세요.

일생을 무자녀로 보낸 후에 하쉠께서 아브라함이 100세가될 때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그 아들 이쯔학크(이삭/이사악)가 그의 유산을 이어갈 거라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쯔학크를 통해야 너의 씨라고 불릴 것이다’ (베레쉬트 21:12)

그러다가 하쉠께선 2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너가 사랑하는 네 외동아들 이쯔학크를 데리고...올림제물로 그를 올려라.’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나요?

아브라함은 의심하거나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나귀에 안장을 얹고 나무를 쪼개어 떠났습니다. ‘당신은 이쯔학크를 통해서’라고 하셨지만 지금은 제게 그를 ‘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와 같은 물음도 없었고,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쉠께서 ‘내 앞에서 걸어가며 순전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아무 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한 일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쉠의 뜻을 이룬다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취소하고 자신의 본질을 하쉠께 완전히 무효화시킨 믿음의 수준이었습니다.

구절은 ‘그가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고 말했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말했고, 나는 준비되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마음을 더 깊이 열어보면,

하쉠께서 그를 부르실 때 아브라함이 ‘히네니’라고 대답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히네니는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요.’

‘이제 여기서 드디어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나는 그를 당신에게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여기 이 세상에서 당신을 섬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여기 나는 불타는 용광로에 있습니다. 당신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쉠과 함께 순전하여’라는 의미는 ‘당신의 뜻이 무엇이든 제게는 그것이 모두 똑같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다비드가 트힐림 40:9에서 ‘제가 당신의 뜻을 행하길 원합니다 나의 엘로킴이여’라고 기도한 것처럼,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인들인 짜디킴(의인들)에게는 ‘현세와 다가올 세상이 다름이 없다’라는 것이 현인들의 비밀스런 가르침입니다.


의인은 ‘당신께서 나를 원하면 내가 당신과 함께 할 것입니다. 제게 그것이 모두 똑같습니다.’라고 합니다.

이 명령, 이 ‘순전으로의’ 부르심은 개개인이 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각자의 수준에 맞춰 모든 개인에게 전하는 부르심입니다.

그건 단순한 전망이 아니고 삶의 방식이며, 가장 깊은 수준에서 ‘하쉠만이 우리의 선을 통제하고 추구하신다는 것’을 믿고 아는 것입니다.


미드라쉬는 우리가 드바림 6장에서 배운 ‘네 마음을 다하여 하쉠, 네 엘로킴을 사랑하라’라고 하는 계명이 하쉠에 관해서 당신의 마음이 시시각각 달라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하쉠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손을 대든 받아들인다는 것을요.

더 깊은 수준에서, 이번 주 부분의 하쉠과 함께 순전하라는 부르심은 그 분을 사랑하라는 계명에 포함됩니다.


그러니 어느 때보다도 마음을 더 깊이 열어보세요.

선조들의 장에서 우리는 진정 유일한 사랑이란 것은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사랑임을 배웁니다.

사랑이 어떤 외적 요인이나 배려, 또는 동기에 의존한다면 그것이 제해질 때 사랑도 사라집니다.

만약 하쉠에 대한 사랑이 하쉠께서 그를 대하는 방식에 달려있는 거라면 그는 모든 일이 ‘그가 원하는 대로’ 진행되는 동안엔 사랑을 느끼지만, 하쉠께서 그를 공정하게 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면 하쉠에 대한 그의 사랑은 금세 식어버릴 것입니다.


하쉠을 사랑한다는 마음이 확고하다는 것은, 그것이 어디에서 무엇이든, 어떤 상황이든, 그리고 어떻게 보일지라도 그것들이 모두 하쉠의 친절과 자비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은 시들지 않을 것이며, 그러한 믿음은 ‘하쉠, 너의 엘로킴과 함께 순전하라’라는 토라의 부르심에 대한 성취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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