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샤트 베레쉬트 5783


샬롬, 새해가 되었고 창조가 다시 새롭게 되었으며, 우리 모두가 다시 새로워졌습니다.

그렇게 이번 주부터 우리는 안식일의 첫 번째 토라 부분인 ‘파라샤트 베레쉬트(창세기)’와 함께 토라 읽기의 연간 주기가 다시 시작됨을 경험하기 적합해 졌습니다.


지난 몇 주간의 모든 경험은 재창조에 맞춰져 있었는데, 쑤코트(초막절) 동안 내내 거룩한 명절의 궁극적 목표는 우리의 삶을 재조정하고 우선순위를 정하도록 돕는 것이었습니다.


실로 우리의 모든 초점은 하쉠을 우주의 왕으로 인정하고 우리의 삶에서 하쉠에 대한 인식을 심화 시키며, 씸하트 토라(토라 축일)의 절정과 함께 토라 자체라는 선물과 그리고 이스라엘의 삶에서 그것이 우위에 있음을 기뻐하고, 하쉠과의 관계에서 좋은 점들로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데 있었습니다.


이번 주의 토라 부분인 파라샤트 베레쉬트는 무()로부터 하쉠께서 일으키신 광대하고 장엄한 창조의 권능과 함께 우리 우주의 시작에 대해 열고 있습니다.


다비드 왕은 트힐림(시편) 89편에서 ‘세상이 친절로 지어졌나니’라고 기도하는데, 유대 현인들은 이 개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것이 하쉠의 친절의 속성, 즉 인간에게 좋은 것을 베풀고자 하는 신성한 열망이며 이것이 창조의 이유이자 모든 존재의 기초이다.”


그러나 유대 현인들은 “한편으론 하쉠께서 세상이 친절함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음을 예견하셨고, 그렇기에 하쉠께선 신성한 정의의 속성으로 창조물들의 균형을 맞추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두 구분이 우리 삶의 배경을 형성합니다.


창조 여섯째 날인 로쉬 하샤나에 아담과 하바(하와/이브)는 이 아름다운 세상에 창조되어 놓여졌고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열쇠를 받았는데, 그 의미는 그들에겐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하쉠의 완전한 단일성이라는 모든 현실의 단일성을 드러낼 기회를 부여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지식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단 한 가지의 명령을 받았는데, 하쉠의 명령에 순종한다면 세상을 완전하게 하고 창조의 목적을 이루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 대신 ‘선택’을 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선택하는 능력인 ‘자유 의지’로, 하쉠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 분을 섬기기를 원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지식 나무의 이야기는 이 세상이 선택과 시험의 세상이고, 우리 각자와 모두를 의미하는 ‘사람’은 옳고 그름, 삶과 죽음, 그리고 하쉠의 명령과 우리 자신의 상상을 따를 것인지를 선택하기 위해 여기에 놓였습니다.


해서 아담이 나무의 열매를 먹었던 이유가 원래 ‘뱀’으로 대표되는 외부 요인인 악한 성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쉠을 섬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라는 매우 깊은 관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무에서 먹자마자 그의 본성의 일부가 됩니다.


다른 말로, 그 행위는 하쉠께 더 가까이 가려는 의도적인 시도로 볼 수도 있는데, 우리가 아담을 이해하고 그를 호의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손해와 혼란, 그리고 은폐 등이 그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이며 그가 시험에 실패한 결과라는 것을 알지만 그와 더불어 여전히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좋음도 그의 덕분이었습니다.

인간의 창조는 최고의 영광이며, 세상에서 인간의 역할은 놀라운 것임을 토라는 가르치는데, 자신을 통제하려는 자기의 욕망을 극복하고 하쉠께 귀를 기울이며, 하쉠께서 통제하심을 인정함으로써 좋은 선택을 함으로 그는 모든 창조를 완성하고 마무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 토라 부분엔 단순한 수준의 의미가 없고 이해하기 난해한 부분들이 굉장히 많은데, 창조 그 자체와 아담과 하바의 창조, 그들의 죄와 추방, 에덴 정원, 지식 나무, 뱀 등 이 모든 개념의 물리적 표현이 광대한 영적 현실들에 해당하기에, 비록 당장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토라가 ‘가르침’이라는 것과 토라의 목적이 ‘삶을 위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아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직접 연관됨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니 마음을 열어보세요.


5장 1절은‘이것이 아담의 족보다’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이 언급하는 이 책, 가족 앨범은 무엇일까요?


유대 현인들은 하쉠께서 아담에게 그로부터 이어지게 될 운명인 모든 영들을 보여주셨다고 가르치는데, 이것이 우리의 세계이고 따라서 창조는 우리의 이야기이며, 아담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기에 그의 이야기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는 하쉠의 작품이며,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서와 우리 모두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의 뿌리이자 근원입니다.


자, 이제 가장 깊게 마음을 열어보세요.


1절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첫머리에 하쉠께서 ‘하샤마임 베하아레쯔’, 즉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땅을 의미하는 ‘아레쯔’의 어근은 ‘욕망’을 의미하는 라쫀과 연결됩니다.

그렇기에 땅 자체의 본질은 욕망의 개념을 전달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 모든 수준의 창조물과 심지어 행성 자체를 구성하는 무생물의 물질적 요소들, 돌과 땅에서 동물들, 그리고 인간 자신에 이르기까지 하쉠에 대한 소모적이고 불타는 열망/욕망에 의해 모든 것이 끊임없이, 그리고 거침없이 결합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정되든 인정되지 않든, 감사를 받거나 또는 부정되든,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이것은 전 세계를 이끄는 활력이고, 전 세계에 연료를 공급하는, 하쉠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열망/욕망인데, 그것은 창조주의 빛에 가까이 붙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라는 것을 가장 깊은 차원에서 절대적으로 명확하게 인지하는 한 사람의 심장박동과 같이 모든 삶에 울려 퍼집니다.


가장 깊은 집단적 직관 수준에서, 모든 존재는 다른 무언가를 위해 살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하쉠께서는 모든 존재의 창조주이시기에, 그는 각각의 모든 창조물과 각 수준의 존재들과 친밀한 유대감을 유지하십니다.

심지어 돌 조차도 하쉠께서 창조하셨기에 어느 정도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 정도가 비록 미미하더라도 ‘신성함’에 대한 인식이 그 안에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영혼은 모든 창조물의 본질과 모든 창조물의 이해 수준에 따라, 창조주의 빛에 더 가까이 닿고자 끝없는 열정으로 끊임없이 움직이며, 욕망과 동경이라는 이 교향곡의 부단한 박자는 존재의 배경음악을 형성해 줍니다.


이 모든 것이 2장 1절 ‘하늘과 땅과 그들의 모든 군대가 완성되었다’의 한 가지 비밀에 불과한데, ‘그들이 완성되었다’라는 ‘바익훌루’의 어근엔 또 다른 의미가 더 있습니다.


이 단어는 깊고 만족할 줄 모르는 열망을 전해주는데, 이 단어는 트힐림 84편의 문맥에서 사용되었습니다:“제 혼이 하쉠의 뜰을 열망하여 애를 태웁니다. 제 마음과 제 육체가 살아 계신 하쉠께 열렬히 노래합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의 구절인 “바익훌루 하샤마임 베하아레쯔”에서도 이 단어를 단순히 ‘하늘과 땅이 완성되었다’라고만 번역하기 보다는 ‘하늘과 땅이 (하쉠을 향한 열망으로 인해) 애통해 했다/쇠약해졌다’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이 열망으로 인해서, 하늘과 땅과 모든 것이 창조되고 완성되었습니다.


바익흘루라는 단어의 두 가지 의미는 이 집단적 범지구적 열망의 시작을 창조의 완성으로 봉인한 것입니다.

하쉠을 향한 이 보편적 열정은 너무도 포괄적이라서 그것을 의식적으로 인식하는 이들은 자신을 완전히 무효화 시키고 하쉠의 단일성과 일치하여 하나가 되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원하지 않게 됩니다.

다비드 왕은 이것을 알고 느껴서 트힐림 84편에서 이 비밀을 암시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하쉠에 대한 갈증 그 자체가 세상을 지탱하는 힘이라는 비밀 말입니다.


또한 탈무드의 현인들은 그 모두를 요약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유감스러운가.’


실로 오늘날 우리의 세상은 불신앙의 오만으로 가득 차 있는 듯 한데, 그것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무에서부터 이 모든 것을 일으키신 분을 부인할 정도로 자기 과시를 하기 위해 오만, 지겨움, 냉소적인 조롱, 통제하고자 하는 강력한 욕망을 필요로 하며, 그리고 동시에 세상이 하쉠으로 인해 창조 되었다고 믿는 이들을 종종 ‘마음이 약하다’거나 심지어 ‘위험한 사람’으로 특정 짓습니다.


1987년으로 돌아가보면, 미국 대법원은 공립 학교에서 창조론을 가르치는 것이 위헌임을 판결하고, 2007년엔 ‘믿음의위험성’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 유럽 평의회 의회는 ‘민주주의적 결과’라는 것으로 ‘본의회는 우리의 교육 시스템 내에서 창조론적 사상이 확산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라는 결의안 #1580 을 발표합니다.

“우리가 조심하지 않는다면 창조론은 인권에 대한 위협이 될 것이다”, 이는 유럽 평의회의 주요 관심사입니다.


창조된 세계에 대한 믿음이 어떻게 인권에 대한 위협이 되나요?

이 모든 것은 파라샤트 베레쉬트의 마지막 부분에 묘사된 시나리오를 연상시키는 것 같은데,여기서 정반대의 사실이 증명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권을 수호하는 가치를 무너뜨리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아담 이후 10세대 동안 인류 전체는 하쉠을 부인했었고, 세상은 인간의 악으로 가득 차서 하쉠께서 ‘재고’하심으로, 인간을 창조하고 난 후 우리가 다음 주에 배우게 될 파라샤트 노악흐(노아)에서의 ‘대홍수’에 이르게 됩니다.

통제에 대한 인류의 집단적 욕망과 창조주와의 불신, 그리고 단절은 다음 주 분량의 시작 부분에서 ‘땅이 하마스로 가득 찼다.’로 묘사됩니다.


‘하마스’는 폭력적인 강도 등을 의미하며, 모든 방식의 착취, 조작, 학대 및 타인에 대한 모욕 등을 전달하는, 요컨대 ‘모든 인권의 폐지’를 나타내는데, 인간은 창조의 목적이자 창조의 동반자이기도 합니다.

하쉠께선 인간을 ‘완벽’에 도달할 수 있던 자리에 두셨지만, 그는 정원에서 ‘일하고 지키라’는, 세상을 발전시키고 세상을 보호할 임무를 또한 받았습니다.


이제 당신의 삶에서 그 어느 때보다 확실하게 마음을 열어 보세요.

이 파트너십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이 세상의 창조가 완성된 후 2장5절에는 ‘들의 모든 나무가 땅에 있기 전이며 들의 모든 채소가 싹이 나기 전이었으니, 하쉠 엘로킴께서 땅 위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일구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라고 전합니다.


이 얼마나 당혹스러운 구절인가요?

땅은 무르익었으며, 만개한 풍요로움으로 이미 가득해질 준비가 되어있었고, 들판의 나무와 풀은 만들어졌지만 지면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뭘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일까요?

땅을 갈아낼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어떤 방식의 일이 누락되었던 것일까요?

씨앗은 이미 심어졌었고, 하쉠께서 직접 그것들을 심으셨으며, 하쉠께선 땅을 경작할 사람을 필요로 하지도 않으셨는데 말입니다.


라쉬는 거기서 현자들의 가르침을 인용해 ‘모든 식물이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여섯째 날까지 땅의 입구에 서 있었다.’라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왜였을까요?

땅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기에 ‘비의 유익’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지만, 사람이 와서야 비가 세상의 필수 조건임을 깨닫고 그것들을 위해 기도해 비가 내려 나무와 풀을 싹 틔우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쉠께서는 비를 청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신 겁니다.


하쉠께선 우리를 이 세상에서 일하게 하고 정원을 보호하게 했습니다.

그 분께선 모든 사람의 의견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그에 대한 인정과 기도, 그리고 우리가 모든 축복에 대해 하쉠께 의존한다는 걸 인정하는 것은 우리가 ‘동반자’ 관계이며, 창조주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의 표현이고, 그 열망은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하쉠의 열망이 됩니다.


라브 하임 리치만 Rabbi Chaim Richman

번역: 아담 리 (유대교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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