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샤트 레에 '시각의 힘'

샬롬, 이번 주 토라 부분은 드바림(신명기) 11:26부터 시작되는 ‘보다’를 의미하는 파라샤트 ’레에’입니다.


첫 구절은 ‘보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축복과 저주를 두니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너희 엘로킴 하쉠의 명령들을 너희가 들으면 축복을, 그리고 너희가 너희 엘로킴 하쉠의 명령들을 듣지 않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길로부터 너희가 벗어나서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라 걸어가면 저주를 줄 것이니’입니다.


모셰가 여기서 묘사한 ‘그리짐 산과 에발 산에서 민족에게 전해질 축복과 저주의 집회’는 나중에 27장의 파라샤 ‘키 타보’에서 일어납니다.

많은 계명들이 이번 파라샤인 레에에서 명령되고, 실제로 드바림 책에서 발견되는 모든 계명의 대부분은 파라샤 레에와 다음에 이어질 두 파라샤에서 주어집니다.

따라서 이번 부분에 이해해야 할 중요한 개념들이 많이 있지만,먼저 이번엔 그 부분이 시작되는 첫 번째 단어, ‘레에;보다’가 전하는 강한 교훈에 초점을 맞춰보고 싶습니다.


모셰는 백성들에게 축복과 저주를 ‘보도록’ 지시합니다.

그런데 축복과 저주가 눈에 보이는 것인가요?‘

그것은 영적 개념들이기에 모셰는 ‘레에’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우리의 관심과 초점을 ‘시각의 힘’이라는 영적 차원으로 돌립니다.


우리는 우리의 눈을 어떻게 사용하나요?

우리는 우리가 볼 것을 현명하게 선택하나요?

우리는 어떤 삶의 채널을 보고 있나요?

우리는 우리 눈 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정말로’ 보고 있나요?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에 주의하고 있나요?


우리 각자는 이런 질문을 분명 매우 신중히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눈은 말 그대로 우리 삶의 축복을 보는 데 사용하거나 또는 결코 볼 수 없는 부정적인 것들을 봄으로써 우리의 시야를 망칠 수 있습니다.


해서 마음을 열어 보세요,

진실은, 우리의 눈이 우리의 시야를 제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 앞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의 ‘극히 일부’만을 보는 것이고, 우리는 우리 앞에 지나가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을 배웁니다.

그러나 하쉠께선 그의 모든 창조물들을 우리 앞에 펼쳐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고, 실제로 우리는 무한한 시각 능력, 즉 물리적 차원을 초월해 영적 영역까지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서 창조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담이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기 전에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세상의 한 쪽 끝에서 다른 쪽 끝을 볼 수 있도록 창조 되었습니다.

그것이 우리 눈의 타고난 힘입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시각적 재능의 진정한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 중 극히 일부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축복을 ‘보아라’라고 하는 모셰의 명령은 우리가 시력을 올바르게 사용하고 있는 지를 항상 알고 기억해야 함을 촉구합니다.

우리는 눈의 장엄한 힘과 영적인 시각의 힘을 보호하고 육성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다시 배워야 합니다.

토라는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좋든 나쁘든 우리의 일부가 되기 때문에 눈을 보호할 것을 지시합니다.


그러니 가장 깊은 방법으로 마음을 열어보세요.

탈무드는 엄마 뱃속에 있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태아에게 가장 높은 수준의 영적 시각이 부여된다고 가르칩니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태 중에서 그 아이에게 토라의 전체를 가르치는 하늘의 천사들과 직접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할 뿐 아니라,

라브(랍비)들은 촛불이 태아의 머리 위에서 타오르고, 그 빛으로 아이가 세상의 한 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본다고 가르치는데,

마치 이요브(욥)가 이요브 29:3에서 ‘그가 그의 등잔을 내 머리 위에 비춰 주셔서 그의 빛으로 내가 암흑을 걸어간다.’라고 회상한 것과 같음을 의미합니다.


이 가르침은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계시입니다.

‘세상 한 쪽 끝에서 다른 쪽 끝을 보는 촛불인 태아’라는 이 독특한 묘사와 표현은 아담이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어 타락하기 전의 그의 환상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태중의 태아가 보는 능력은 아담이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기 전에 누렸던 영적 시야의 완성 수준에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열고 이것이 얼마나 깊은지 더 이해하려 해보세요.

태중에 있는 모든 아이는 ‘작은 아담’이며, 인간의 유산이 되는데 있어 창조주가 실제로 계획한 것이 무엇인지를 엿보는 걸 즐기는 중입니다.

인간이 의도 된 본래의 모습을 체험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여전히 모든 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다는 것,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태어나지 않은 모든 아이는 아담의 죄 이전의 영적인 위대함의 수준에 있다는 것입니다.

태어나면서, 우리는 배운 것을 잊고 영적인 시각을 잃어버립니다. 그러고서 우리는 우리의 남은 생을 보내며 그것을 되찾을 자격이 있는 자로 발견되기 위해 우리의 잠재력에 부응하며, 하쉠께서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나아갑니다.


그 영적 비전이 밝혀 줄 것은 무엇일까요?

베레쉬트(창세기) 1:31에서 토라는 창조의 여섯째 날에 하쉠의 일이 완성되었을 때 ‘엘로킴께서 그가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라,매우 좋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쉠의 비전은 모든 피조물의 전체를 취해 그것들이 좋다고 선언되었고, 그 분께선 그 시각의 힘을 피조물의 모든 측면에 불어넣으셨습니다.

따라서 완전한 시각의 잠재력이란 것은 창조의 모든 세부 사항에서 찾을 수 있는데, 바로 모든 면이 모든 사물의 완전한 일치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하쉠께선 ‘하나’이며, 그의 창조물은 그 일치의 반영이자 산물입니다.


우리는 시각적인 장애를 앓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물들을 연결되지 않은 ‘구별되며 분리된’ 것으로 보고, 우리 자신과 서로를 ‘독립적이며 분리된 단위’로 인식합니다만 현실에서 우리 모두는 모든 창조물의 완벽한 일치, 즉 ‘유일성’에 포함되고 그 일부인 것입니다.


하쉠께서 시나이 산의 계시로 이스라엘에게 토라를 주셨을 때, 슈모트(출애굽기/탈출기) 20:15에서는 ‘온 백성이 천둥들과 횃불들과 쇼파르 소리와 연기 자욱한 그 산을 보고 있었다. 백성이 보고 떨며 멀리 서 있었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 사건에서 이스라엘 아들들은 소리의 근원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영적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에겐 시각과 청각의 구분과 차이가 없었고 모든 현실이 하나였습니다. 물리학자들은 통일장 이론과 같은 아이디어로 모든 현실의 통합을 묘사하는 방식인 양자 물리학의 맥락에서 모든 것에 대한 이론을 찾는데, 현실에 대한 통일된 일치는 이스라엘이 시나이 산에서 확실하게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자연스러운 상태로의 복귀’였는데

우리의 영적인 힘을 방해하고 무너뜨려 우리 자신과 피조물 전체 사이에 역장(力場)을 만드는 우리의 끊임없는 자기 파괴와 부정적 행동만 아니었다면, 다시 말해, 우리 자신에게 그러지 않았었다면 우리는 오늘도 ‘이 수준’에서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시나이 산의 소리는 여전히 울려 퍼집니다.

하쉠께선 매 순간 모든 피조물의 총체를 새롭게 하는데, 여기서 가장 깊은 방법으로 당신의 마음을 열어보면, 우리 모두는 우리 눈의 주요 기능이 우리가 보지 못하게끔 막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눈은 실재의 본질을 여과하고 가려 우리가 볼 준비가 된 것만 볼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감각도 또한 마찬가지로, 그것들은 우리의 감각을 세분화 해 ‘분리의 환상’을 조장함으로써 우리의 경험을 제한 시키고 모든 것의 ‘일치된 현실’을 가립니다.


드바림의 이 모든 토라 부분의 배경은 모셰가 그의 백성에게 권고한 목적을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이 이스라엘 땅에 즉시 들어가게 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그 땅으로 들어오면서 그들은 삶의 새로운 장을 시작할 것이고, 그것은 그들이 그토록 오랜 세월을 보낸 광야에서의 삶과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었습니다.

그 땅에서의 생활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 완전히 다른 수준의 의식이 될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있어 완전히 새로운 일련의 도전들을 제시할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광야에 사는 동안 그들의 머리는 하늘에 있었는데, 우리가 배워왔듯이 광야의 세대와 하쉠과의 연결은 매우 직접적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만(만나)을 먹고 영광의 구름으로 보호 받았고 그들의 모든 필요는 하쉠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제공됐으며, 그들은 자연과 물질 세계 안에서 신성함을 찾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의 그 세계의 일부인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영적 세계에 있는 영적 존재와 같았으며, 영원에 직접적으로 붙어 있었고,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신성한 탯줄에 의해 길러졌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 들어가면 그들은 새로운 현실에 직면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현실에서 물질 세계의 일부가 되어야 했고 물질 세계와 관련 되어야 할 필요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은, 모든 것에 항상 존재하고 모든 것에 스며드는 하쉠의 임재에 정신과 마음을 계속 집중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동일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면서 하쉠께 계속 초점을 맞추려면 거룩함과 순결함에 대한 의식의 발전이 필요하며, 만물의 본질을 볼 수 있는 내적 시야의 발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좋은 점을 볼 것인가요, 아니면 나쁜 점을 볼 것인가요?

통합인가요, 아니면 분리인가요?

축복인가요, 아니면 저주인가요?

우리는 이 세상의 표면적인 물질만을 볼 것인가요, 아니면 모든 것의 신성함을 볼 것인가요?


모셰는 우리의 시각을 올바로 사용하라는 소명을 제시합니다.


진실은,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사이에는 ‘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수준은 하쉠에 의해 권한이 부여되며, 모든 것을 다스리고 유지하는 것은 그의 신성한 섭리로 인해서입니다.

트힐림(시편) 96:11은‘하늘은 기뻐할 것이고 땅은 즐거워하라’라고 선언합니다.

하늘과 땅은 연결되어 있고,물질과 영은 모두 완벽하고 완전한 조화의 일체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올바른 영적 시야를 발전시키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는 하쉠의 존재를 인식해 이 물질 세계의 현실을 성화(聖化)시키는 데 성공할 것입니다.


이번 안식일은 엘룰 월이 새로 시작되는 로쉬 호데쉬의 첫 날입니다.

유대력에서 엘룰은 한 해의 마지막 달로써 유대인들에게 하쉠의 좋은 뜻을 위한 특별한 시간으로 지정되어, 유대인들에게 티슈레이 월의 두려운 명절들인 로쉬 하샤나와 욤 키푸르를 준비하게 하기 위해 진지한 회개와 개인적 성찰, 그리고 결단의 과정을 시작할 수 있는 독특한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안식일에 대해 숙고해보는 놀라운 진리이며, 그렇기에 엘룰 월의 다가오는 날 매일은 지난 한 해 동안 우리의 모든 실수와 과거에 우리가 생각없이 행동했던 모든 과정을 고치도록 완벽한 타이밍과 신성한 조화로 손짓합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이에게 있고 내 사랑하는 이는 나에게 있다’라는 쉬르 하쉬림(아가서) 6:3에있는 히브리어들의 두문자어이기도 한 엘룰은 ‘지금’이 우리의 자연적 친밀감을 창조주와 새롭게 하도록 손짓해야 하는 시기임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파라샤트 레에는 우리에게 비록 찰나이더라도 창조의 전체를 보도록 우리를 도전시킵니다.

창조의 통일성을 본다는 것은 창조주 자신의 ‘하나됨’을 반영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항상 우리의 목표이긴 하지만, 이 영적 임무가 ‘비할 데 없는 수준의 중요성’을 차지하는 엘룰 월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가 엘룰 월을 어떻게 보내느냐로 한 해의 분위기가 결정되기에, 이 달에 우리의 영적 시각을 개선하고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입니다. 겉만 보고 섣부른 판단을 내릴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내적 현실과 두려운 진실을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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